전설적인 F1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는 "2위로 들어오는 것은 사실 가장 먼저 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운동선수는 우승하기 위해 훈련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승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좋은 해결책을 찾아낸다면 다행이지만, 원칙과 건강, 심지어 생명마저 희생하며 승리를 쟁취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투르 드 프랑스의 탄생과 어두운 이면
1903년 7월 18일 토요일, 파리 거리 곳곳에는 구경꾼들이 운집했습니다. 모두가 굴뚝청소부가 직업이고 자전거가 애호였던 모리스 가랭이 초대 투르 드 프랑스의 첫 우승자로 등극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발레다코스타 출신의 30세 가랭은 라이벌들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았고, 종합 2위 루시앙 포티에와의 격차가 거의 3시간에 달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첫 '그랜드 루프'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스포츠 잡지 라우토(L'Auto)를 발행하던 앙리 데그랑주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정확히 적중했음을 확인했습니다. 팬들은 대회를 열렬히 응원했고, 동시에 경쟁 상황을 상세히 다룬 잡지 호수마다 기꺼이 돈을 지불했습니다. 발행 부수와 수익이 늘어나고 경쟁 매체는 뒤처지면서, 이 대회는 정기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했습니다.
1년 후에는 88명의 도전자가 출발선에 섰습니다. 모두가 최후의 영광을 꿈꿨지만, 우승 후보는 여전히 가랭이었습니다. 6개 구간으로 나뉜 코스에는 수백만 프랑스인이 몰려들어 열정적으로 응원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팬들의 사랑은 한계를 넘어섰고, 여러 진영으로 나뉜 사람들은 극도로 무분별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한 선수에 대한 응원은 다른 선수에게는 피해로 돌아갔습니다. 실제로 한 참가자에게는 설사약이 녹아 있는 음료가 건네졌습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당시 우승자였던 앙리 코르네 역시 어느 구간에서 식사에 초대받았는데, 그가 받은 치킨에는 적대적인 팬이 버비탈(수면제)을 몰래 넣어 두었습니다. 식사 후 몇 분 만에 코르네는 길가 도랑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를 찾아낸 관계자들이 의식을 되찾게 하고 다시 달리기를 계속하도록 만든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팬들은 와인병을 던지고, 자전거 프레임을 톱으로 자르고, 코스에 못을 뿌리며 방해했습니다. 하지만 선수들 역시 성인군자는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모리스 가랭은 1904년 영웅에서 반전의 주인공으로 전락했습니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것은 사실이지만, 6개월 뒤 그가 코스의 상당 부분을… 기차로 이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쨌든 그해 대회에서는 상위 네 명이 모두 부정행위를 저질러, 결승점에서 5번째로 들어온 앙리 코르네에게 최종 우승이 돌아갔습니다. 오직 그 한 명만 공정하게 달리려 노력했던 것입니다.
마라톤에서 지치지 않는 법?
이 사건들로부터 한 달여 뒤, 세인트루이스 인근에서 올림픽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폭염 속에 32명의 참가자 중 요구 거리를 완주한 선수는 단 14명뿐이었습니다. 일부 선수는 미국 규정이 허용한 대로 마지막 구간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선수는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레드 로르츠, 석탄 배달부로 일하던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날 프랜시스 필드 경기장에 모인 1만 명의 관중에게 그는 새로운 영웅이 되었습니다. 물론 잠시 동안만이었습니다.
프레드가 축하를 받는 동안, 같은 팀의 톰 힉스는 마지막 몇 미터를 힘겹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탈진해 환각 증세까지 보였고, 결승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행히 이 어려운 순간 의사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그를 도왔습니다. 정신을 차린 톰은 즉시 심판들에게 알렸습니다. 로르츠는 15km 지점에서 이미 경련을 일으켜 고전했고, 32km 지점쯤에서 갑자기 자신을 추월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코스의 고단함을 전혀 느끼지 않은 듯 산뜻해 보였습니다. 프레드의 이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알고 보니 로르츠는 실제로 초반 구간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지나가던 자동차 하나를 세웠습니다. 운전자와 이야기를 나눈 뒤 차에 올라탄 그는 이후 15km를 조수석에서 쉬면서 라이벌들을 추월해 나갔습니다. 다른 마라토너들의 증언이 힉스의 말을 뒷받침했고, '교활한' 프레드는 실격 처리되었습니다. 훗날 왜 그런 짓을 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차가 고장 났을 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달리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1904년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토머스 힉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훗날 알려진 바로는 그 역시 깨끗한 경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탈진으로 경기를 포기할 위기에 처했을 때, 동료들이 브랜디, 닭고기 단백질, 스트리크닌(살충제 성분)으로 만든 '에너지 음료'를 그에게 건넸고, 이런 종류의 '각성제' 사용은 당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메달이 회수되지는 않았습니다.
기술로 놀라게 하고, 기술로 이기다
승리와 영원한 영광에 대한 열망은 스포츠에 기술 혁신을 불러왔습니다. 물론 혁신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4년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아돌프 다슬러가 서독 대표팀을 위해 준비한 축구화는 축구 역사상 진짜 혁명이었습니다. 이 신발에는 날씨에 따라 교체할 수 있는 탈착식 스터드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유명한 헝가리 '골든 일레븐'과의 경기에서 독일 선수들은 상대와 달리 스터드를 더 긴 것으로 교체할 수 있었고, 젖은 잔디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이 해결책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제프 헤르베르거 감독이 이끄는 독일은 헝가리를 3대 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육상 경기장에 탄소 또는 유리 섬유 장대가 등장하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충격은 컸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알루미늄 장대를 사용했고, 그 이전에는 나무와 대나무 장대를 썼습니다. 새 장대의 유연성 덕분에 선수들은 기존 기록을 크게 경신했습니다.
미국의 높이뛰기 선수 딕 포스버리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는 훈련 과정에서 '포스버리 플롭'이라 불리는 도약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처음 본 경쟁자들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딕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법을 바꿔 스포츠 수준을 크게 끌어올리고 라이벌들을 놀라게 하며 자신의 종목 정점에 오른 또 다른 선수는 스웨덴의 스키점프 선수 얀 보클로프입니다. 그가 사용한 'V자 스타일'은 점프 거리를 늘리고 건강에도 더 안전했습니다. 1988/1989 시즌 보클로프는 월드컵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전문가들은 이것이 혁신적인 기술 덕분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수들이 사용한 모든 방법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마라톤에서는 30도를 넘는 폭염이 참가자들에게 큰 시련이 되었습니다. 주자들은 온갖 방법으로 라이벌과 더위를 이겨내려 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방법을 선보인 이는 포르투갈 역사상 첫 올림픽 마라톤 참가자인 프란시스쿠 라자로로, 출발 직전 몸에 왁스를 발랐습니다.
관중들의 함성과 성적 향상을 노린 각종 처치는 잠시 동안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염을 잊게 해 주었습니다. 진짜 참극은 출발 후 몇 킬로미터 지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자들이 하나둘 코스에서 이탈했고,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라자로도 있었습니다.
몸에 바른 왁스는 햇빛을 반사해 최종 승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게 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것이 밀봉재처럼 작용했습니다. 왁스는 땀이 배출되는 것을 막아 수분과 전해질 균형에 심각한 이상을 일으켰습니다. 과열된 그는 여러 차례 의식을 잃었고, 결국 의사들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프란시스쿠는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올림픽 경기 중 사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승리를 갈망하다 큰 잘못을 저지른 또 다른 올림피언은 근대5종 선수 보리스 오니셴코입니다. 1976년 펜싱 경기에서 한 라이벌이 소련 대표의 기가 막힌 부정행위를 적발했습니다. 보리스는 검에 스위치를 장착해 누를 때마다 전기 회로가 닫히고 득점 신호등이 켜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영리한 선수가 이 장치를 몇 번이나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개조 행위로 그는 평생 자격 정지 처분을 받고 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되었으며, 군인 신분으로서 소련군에서도 제명되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 라이벌 제거!
스포츠에서 성공을 거두는 가장 비열한 방법은 상대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스포츠 역사에는 이런 사례도 존재합니다.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최고의 두 피겨 스케이터 토니아 하딩과 낸시 커리건의 대결은 전례 없는 비스포츠적 양상으로 번졌습니다. 모든 것은 1994년 1월 6일 디트로이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대회를 준비하던 낸시는 연습을 마치고 링크에서 내려왔습니다. 훈련은 순조로웠습니다. 탈의실로 가려면 스케이터는 긴 복도를 지나야 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망원봉으로 무장한 공격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성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여러 차례 내리쳤고, 선수는 쓰러졌습니다. 몇 분 후 그녀는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다리는 '겨우' 멍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낸시 커리건은 전국 선수권 대회 출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부재 속에 대회를 우승한 사람은 다름 아닌 최대 라이벌 토니아 하딩이었습니다. 우연일까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가 배후에 있었는지는 빠르게 밝혀졌습니다. 하딩의 전남편 제프 길룰리와 그녀의 경호원 숀 에카르트의 지시로, 올림픽 준비 중이던 낸시를 셰인 스탄트라는 남자가 공격한 것입니다. 토니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연맹은 그녀를 올림픽 대표팀에서 제외하기로 했지만, 이후 결정을 번복했고 부정직한 스케이터는 릴레함메르에 출전했습니다. 공격당한 라이벌 역시 회복하여 올림픽 링크에 섰습니다. 그곳에서 최후의 대결이 벌어졌고, 승자는 낸시 커리건이었습니다. 그녀는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토니아는 8위에 그쳤고, 이것이 사실상 그녀의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두 선수가 귀국한 뒤 연맹 관계자들은 하딩에게 평생 자격 정지와 10만 달러가 넘는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스케이터는 눈물로 자신을 변호하며 남편과 그의 동료들의 계획을 FBI에 알리려 했지만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훨씬 더 비극적인 것은 복서 루이스 레스토와 그의 진영이 저지른 짓이었습니다. 빌리 콜린스 주니어와의 경기를 앞두고 그들은 훈련장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서열이 낮은 푸에르토리코 선수의 첫 타격들은 미국 선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레스토의 펀치는 매우 무거웠고, 콜린스의 얼굴은 위험할 정도로 부어 올랐습니다. 1983년 6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이 대결은 10라운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패한 아들의 아버지는 승자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러 다가갔다가, 루이스의 글러브가 비정상적으로 단단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즉시 경기 위원에게 알렸고, 위원은 글러브 검사를 명령했습니다.
알고 보니 레스토의 장비는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글러브에서 일부 재료가 제거되어 있었고, 경기 전 푸에르토리코 선수의 손을 감았던 붕대에는 석고가 배어 있었습니다. 글러브를 손본 사람은 그의 코치 파나마 루이스로 추정됩니다. 이 때문에 콜린스 주니어는 경기 중 상대의 주먹이 돌덩이 같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 경기의 결과로 빌리는 시력에 문제가 생겨 복싱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습니다. 이후 일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콜린스는 술로 위안을 삼았고, 이어 우울증, 이혼, 그리고 교통사고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이 뒤따랐습니다.
참고 자료
- Grinberg, A. Parczewski, Olympics of athletes: volume 3 Saint Louis, Warsaw 2020.
- Collective work, Kronika Sportu, Warsaw 1993.
- Filek, Cards from the history of sport, Poznań 2012.
- https://historiasportu.info/2017/10/07/borys-oniszczenko-cwaniak-stulecia/
- Delimat, Film: The tragedy that rocked boxing, posted on YouTube channel "Thirteenth R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