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펫 폭격이라 하면 주로 연합군이 제3제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동부 전선에서도 이러한 폭격이 있었고, 그중 가장 큰 규모의 작전은 1942년 8월 23일 단행되었습니다. 목표는 스탈린그라드였으며, 이 공습으로 약 4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42년 8월 23일 일요일, 날씨는 맑고 따뜻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염을 피해 볼가 강변 산책로로 나온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이 이미 도시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거리까지 진전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공 경보가 울려도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수없이 사이렌이 울렸고, 모든 경보가 허위로 판명됐으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잔해 더미가 될 것이다"
독일 제4항공함대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대장은 5년여 전 게르니카에서 저질렀던 일을 다시 반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번 작전의 규모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컸습니다.
표적은 바스크의 작은 마을이 아니라 인구 60만이 넘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였습니다. 앤터니 비버가 고전 『스탈린그라드』에서 언급했듯이, 리히트호펜은 "러시아인들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해" 1,200대의 폭격기를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4항공함대 소속 거의 모든 항공기를 이 임무에 배정했습니다. 하인켈 He 111, 융커스 Ju 88, 급강하 폭격기 Ju 87 '슈투카' 등 1,000대가 넘는 폭격기가 도시 위로 투입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공중 함대는 오후 4시경 스탈린그라드 상공에 도달했고, 곧 폭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8월 23일 폭격 직전 스탈린그라드 중심부를 담은 독일군 항공 사진.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예브게니 실베스트로프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하늘 전체가 비행기로 덮였습니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비행기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작은 편대로 날아왔고, 하늘이 수평선까지 점점이 얼룩덜룩하게 뒤덮여 꽃무늬 식탁보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 20분쯤, 요란하고 날카로운 굉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검은 흙으로 된 거대한 흙더미가 하늘로 치솟는 것이 보였습니다. 창문이 빠져나가고 문짝이 경첩에서 뜯겨 나갔습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대도시 곳곳에서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독일군은 고폭탄뿐 아니라 소이탄도 엄청난 양으로 투하했습니다.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도시 남서부에서는 거대한 화재 폭풍이 일어나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집어삼켰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중심부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처참했습니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타타르 언덕, 마마예프 언덕에서 소풍을 즐기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숨을 곳이 없었습니다. 간신히 대피소나 지하실에 몸을 숨긴 사람들조차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 다수는 무너진 건물 아래에 깔려 산 채로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강변에서는 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었고, 작은 노와 맨손으로 강변 모래를 파서 총알과 폭탄을 피할 수 있는 구멍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때 볼가 강 수면을 스치듯 낮게 나는 독일군 항공기들이 나타났습니다. 무리 지어 날아온 그들은 배 위에 매달리듯 먼저 폭탄을 떨어뜨린 뒤 기관총을 난사했습니다."
결코 잊히지 않을 하루
공습의 참상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에게조차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누구도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악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수많은 것을 겪어왔지만, 이것은 […]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14시간에 걸친 폭격 동안 독일군은 도시에 거의 1,000톤의 폭탄을 투하해 최대 4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사진은 불타는 스탈린그라드.
물론 독일군은 주거 지역만 공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업 지대 역시 집중적으로 폭격당했습니다. 볼가 강변에 있던 유류 저장 탱크도 피격되었고, 그 폭발로 인해 거의 500미터 높이까지 치솟는 거대한 불덩이가 만들어졌습니다. 전화 교환국과 상수도 시설도 파괴되었습니다.
도시는 혼란에 빠졌고, 당국의 결정이 이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당국은 주민 대부분이 강 동쪽 기슭으로 건너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스탈린은 민간인이 남아 있는 것이 병사들에게 진격해오는 국방군 부대에 맞서 싸울 동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한 소년은 이렇게 정곡을 찔렀습니다. "아무도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포탄받이였을 뿐입니다."
약 14시간에 걸친 폭격의 최종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독일군은 약 1,000톤의 고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했습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도시에서 4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보수적인 추산으로는 2만 5천 명으로 잡힙니다.
어느 쪽이든 앨런 클라크의 평가에는 반론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이 공습을 "최대한 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모든 행정 기능을 마비시키며, 공황과 의심을 퍼뜨리려는 순수한 테러 폭격"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했고, 동시에 손실은 극히 미미했습니다. 기지로 귀환하지 못한 항공기는 단 세 대뿐이었습니다.
1942년 8월 30일 독일군이 촬영한 스탈린그라드 중심부 사진. 카펫 폭격이 남긴 엄청난 피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결국 그 엄청난 파괴는 오히려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도시는 완전히 통행 불능이 되었고, 무너진 건물 하나하나가 결연한 붉은 군대 병사들이 지키는 요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