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할힌골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다

대전의 서막은 몽골 초원에서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석 달 앞서 몽골-만주 국경에서 벌어진 한 차례의 충돌이 훗날 세계 대전의 향방을 크게 좌우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할힌골(노몬한) 전투다.

사건의 시작은 의외로 소박했다. 1939년 5월 11일, 몽골 기병 연대가 할힌골 강을 건넌 것이다. 칭기즈칸의 후손들은 비옥한 구릉성 초원에서 말들을 방목하려 했을 뿐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강은 몽골 인민공화국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을 넘은 몽골 기병

적어도 일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몽골 측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에 따르면 국경선은 강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기병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노몬한이라는 큰 정착지를 향해 질주했다. 그들에게 그곳은 당연한 국경 지대였다. 이 같은 '무례'에 관동군 사령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할힌골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다

일본의 동아시아 영토 확장. 짙은 색으로 표시된 것이 만주국 제국이다(사진: Emok, CC BY-SA 3.0).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신속히 몽골군을 할힌골 강 너머로 밀어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과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몽골군이 역습에 나섰고,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몽골 인민공화국은 형식상 독립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크렘린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는 저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산발적인 교전은 약 2주간 이어졌다. 붉은 군대는 군사적 증원을 불러들였고, 5월 28일에는 소련·몽골 연합군이 200명 규모의 부대를 격파하고 여러 대의 구형 장갑차를 파괴했다."

6월 중순에는 소련 항공부대가 일본군 거점들을 폭격했고, 지상군 역시 노몬한으로 진격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무력 충돌로 보였던 사건이 어느새 본격적인 분쟁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본격화되는 충돌

현지 주둔 소련군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6월 5일 현지에 도착한 게오르기 주코프는 자바이칼 군관구 소속 부대로 전력을 보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기서 심각한 물류 문제가 발생했다. 가장 가까운 철도역이 전선에서 650km 이상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병력과 물자 수송의 모든 짐은 트럭 운전사들의 어깨에 얹혔다. 목적지까지 무려 5일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나름의 이점도 있었다. 소련군의 어려움을 알고 있던 일본군은 상대를 완전히 무시했고, 결국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당시 일본군은 노몬한에 고마츠바라 미치타로 중장이 지휘하는 제23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 일부를 투입했다. 관동군 사령부는 또한 도쿄에 상당한 규모의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할힌골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다

할힌골 강 전투의 전황. 붉은색은 소련군의 진격, 남청색은 일본군의 진격을 나타낸다(『제2차 세계대전사 1939~1945』 2권, 모스크바 1974년판 삽도).

이런 움직임을 우려한 일본 참모본부는 갈등을 완화하고자 특별 감시관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소식은 오히려 관동군 사령부가 권한이 의도를 견제하기 전에 작전을 서두르는 계기가 되었다.

6월 27일 새벽, 일본 항공부대는 몽골 내 소련군 기지들을 공습했다. 도쿄는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참모본부는 즉시 추가 공습을 금지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6월 30일 밤부터 7월 1일에 걸쳐 고마츠바라의 부대는 할힌골 강에 도달했다.

할힌골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다

할힌골 강을 건너는 소련 전차. 장갑 부대에게 이 강은 어떤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사진: 빅토르 안토노비치 티오민, 퍼블릭 도메인).

처음에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일대를 조망하는 고지를 점령하며 소련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그러나 사흘간의 격전 끝에 주코프는 공격을 막아내고 침공자를 강 너머로 밀어냈으며, 나아가 강 동쪽 기슭에 교두보를 확보하기까지 했다.

일본군의 처참한 패배

이제 소련군은 대규모 기만 작전, 이른바 '마스키로프카'에 착수했다. 적의 경계심을 마비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병사들에게는 방어에 필요한 내용을 담은 소책자가 대량으로 배포되었고, 확성기에서는 말뚝 박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편 주코프는 이미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새 부대들이 전선으로 이동했고, 시험 운용 중이던 A-32 프로토타입을 포함한 전차들이 집결했다.

일본군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7월 23일 또다시 맹공격을 개시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 문제에 시달리며 세 번째 공격마저 연기해야 했다.

할힌골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다

일본군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싸워도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다. 낡은 장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사진은 노획된 95식 '라고' 경전차를 살펴보는 붉은 군대 병사들의 모습이다.

주코프는 전투 공백기를 놓치지 않고 전력을 계속 증강했다. 최종적으로 그의 손에는 약 58,000명의 병력과 전차·항공기 각 500여 대가 쥐어졌다. 반면 일본군은 65,000명의 병력, 100여 대에 불과한 구형 전차, 그리고 빈약한 공군으로 맞서야 했다. 주코프는 적에게 결정타를 가할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8월 20일 오전 5시 45분,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이후 며칠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대전차 화기조차 없었고 전차의 포탄마저 부족했던 일본군은 그럼에도 완강히 저항하며 붉은 군대에 큰 피해를 안겼다. 하지만 구식 전술과 무장에 의존하는 관동군으로서는 제6군의 운명이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할힌골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다

할힌골 강 전선으로 향하는 일본군 경전차 부대(사진: 마이니치 신문사, 퍼블릭 도메인).

일본 제6군은 포위되어 8월 31일까지 이어진 학살 속에서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본 측은 전사자 8,632명, 부상자 9,087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소련 측 추산은 훨씬 컸다. 전사자 약 23,000명, 포로 약 30,000명이었다는 것이다. 소련군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붉은 군대의 전사자는 7,974명, 부상자는 15,251명이었다.

교전은 9월 15일까지 이어졌다.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본이 제안한 휴전을 수락했다. 이로써 몽골-만주 국경에는 약 6년간의 평화가 찾아왔고, 이 평화는 곧 시작될 세계 대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먼 곳까지 미친 파장

앤터니 비버가 저서에서 정확히 지적했듯, 붉은 군대의 승리는 지대한 결과를 낳았다. 우선 중국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일본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을 한층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굴욕적인 패배는 도쿄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세력의 입지를 순식간에 잠식했다. '남진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바로 할힌골 전투가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프랑스·네덜란드·영국령 식민지, 나아가 태평양의 미국 해군까지 공격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더욱이 뼈아픈 교훈을 생생히 기억한 일본은 1941년 겨울, 독일 국방군이 모스크바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도 히틀러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덕분에 스탈린은 극동에서 절실히 필요한 증원 부대를 유럽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만약 일본이 당시 소련을 공격했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