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16~17세기는 마녀사냥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여성들은 안식일 집회(사바트)를 조직하고, 악마와 거래하며, 그와 음란한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이미지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수백 년 전에는 웃을 사람 하나도 없었다…
마녀사냥 — 중세와 종교 광신주의의 산물인가?
마녀사냥에 관한 가장 널리 퍼진 통념 중 하나는 이것이 주로 중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녀사냥은 이 시대의 말기(약 1400년경)에야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절정은 1560년 이후에 도래해 18세기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희생자 중 한 명은 1782년 스위스 글라루스에서 처형된 안나 괴디(Anna Göldi)였다.
여성이 빗자루를 탄 모습을 담은 최초의 회화는 1440년경 제작되었으며, 마르탱 르 프랑(Martin Le Franc)의 필사본 『레 샹피옹 데 담(Le Champion des dames)』 여백에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거대한 탄압과 고문의 서막이 되었다. '커번(coven, 마녀 모임)' 개념에 대해 역사학자 기 베텔(Guy Bechtel)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위대한 이데올로기적 시편은 수많은 살인을 자행했다."

여성이 빗자루를 탄 최초의 이미지는 마르탱 르 프랑의 필사본 『레 샹피옹 데 담』 여백에 등장한다
두 번째 통념은 마녀사냥이 주로 종교 광신주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삶의 모든 영역이 종교와 얽혀 있었지만, 종교재판관들의 활동 자체는 주로 이단자들에게 집중되었고, 마녀 판결의 가장 큰 비중은 세속 법원이 차지했다. 기 베텔은 "[세속 판사들은 로마보다] 더 큰 잔혹함과 더 큰 광신주의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여성의 악마화
증오의 나선을 감아 올리고, 처음에는 무모해 보이던 일들을 합리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새로운 희생양이 지목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성이었고 사냥 역시 주로 여성을 향했다. 남성도 마술 혐의로 기소되긴 했지만, 이 모든 것을 몰아붙인 근본 동력은 여성 혐오(misogyny)였다. 커져간 적대감은 상상 속 악으로부터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프랑수아즈 도본(Françoise d'Eaubonne)은 이 상황을 "미친 자의 지혜로 학살을 일으키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했다.
마녀들은 인류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의 심신의 나약함과 끝없는 성적 욕망이 결국 악마에게 굴복하게 만들고, 악마의 손안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로 만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마녀재판에서 여성은 피고의 약 80%, 사형 선고자의 85%를 차지했다. 또한 남성이 화형당한 사례 상당수는 피의자인 '마녀'와 가족이거나 친밀한 관계였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알아둘 가치가 있다.

화형대에서 벌어진 처형 장면
여성을 악마화하고 희생양으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사회 최하층의 발상도 아니었다. 인기 있는 설교부터 새롭게 등장한 인쇄물에 이르기까지 가장 효과적인 소통 수단을 활용해 사회를 교묘히 조작한 것은 바로 당대 가장 교양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마녀의 망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 즉 '마녀의 망치'는 바젤 출신 종교재판관 야코프 슈프렝거(Jakob Sprenger)가 알자스 출신 하인리히 크라머(Heinrich Kramer)와 공동으로 저술한 논문이다. 이 마녀 퇴치의 성서는 1487년에 출판되어 마녀사냥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 유럽 전역에서 3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기 베텔은 저서 『라 소르시에르 에 로시당(La Sorcière et l'Occident)』에서 당시 이 저작이 지닌 위상을 강조했다:
"화형이 난무하던 이 시대에 판사들은 모든 재판에서 이 책을 사용했다. 그들은 '마녀의 망치'에서 가져온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답변을 경청했다."
'마녀의 망치'의 출간은 같은 주제의 후속 저작들이 쏟아지는 눈사태를 일으켰고, 악마학 전문가의 수도 크게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마녀 혐의를 받은 여성의 처형
여성을 향한 사냥
독일 트리어(Trier) 주변 지역은 마녀사냥의 가장 중요한 진원지 중 하나다. 1587년부터 1593년까지 단 6년 동안 20개가 넘는 마을에서 368명의 여성이 화형대에 올랐고, 그중 두 마을에서는 여성 인구가 단 한 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런 유형의 소름 돋는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많은 신자들이 마술이 유전된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할머니부터 어머니, 이모·숙모, 딸에 이르기까지 여성 세대 전체가 열정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조사관, 사제, 판사, 처형집행인에 이르기까지 선고 기관은 온통 남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녀로 몰린 여성과 가까운 남성들이 왜 피고 여성을 변호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주로 자신들도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화형대에 오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부는 보복이 두려워 고발자 편에 서기까지 했다. 일부 계산적인 남성들은 곳곳에 팽배한 마녀사냥을 역이용해, 원치 않는 아내나 정부, 또는 자신이 성추행한 피해자를 '검은 마법'을 쓴 혐의로 고발해 일거에 없애 버렸다.

화형대에서 벌어진 대량 처형
화형대에 오르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통용되는 규범에서 벗어난 어떤 행동이든 마녀사냥꾼의 주의를 끌었다. 그중에는 오늘날 우리가 전혀 문제 삼지 않는 요소들이 많았다. 너무 노골적인 옷차림, 과하게 드러내는 섹슈얼리티, 강한 성격, 목소리를 높이는 습관, 미사에 너무 드물게 또는 반대로 너무 자주 참석하는 것까지 모두 해당됐다. 여성의 신체 자체만으로도 악마와의 연관을 의심할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체포된 여성들은 옷을 벗기고 머리카락을 밀린 뒤, 외부적·내부적으로 이질적인 변화를 찾는 수색이 시작되었다. 피부에 불가사의한 반점이나 흉터 하나만 있어도 여성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여성이 정당하게 고발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행해진 가장 유명하고도 황당한 시험 방식 중 하나가 물심험(水審)이다. 여성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무죄였고, 물에 떠오르면 혐의가 입증된 것으로 간주해 화형대에 세워야 했다.
여성 혐오, 여성의 악마화, 그리고 희생양화는 수많은 여성의 고통과 죽음의 원인이었다. 마녀사냥의 시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사회의 여성 절반의 자신감을 흔들어 놓았으며, 『마녀의 망치』는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한 서가에 꽂힐 만큼 악명 높은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 문헌
1. M. 콜레(Mona Chollet), 『마녀들: 여성의 불굴의 힘(Witches. The invincible power of women)』, Karakter, 2019.
2. G. 베텔(Guy Bechtel), 『La Sorcière et l'Occident. La destruction de la sorcellerie en Europe, des origines aux grands bûchers』, 파리, 1997.
3. F. 도본(Françoise d'Eaubonne), 『Le Sexocide des sorcières』, 파리, 1999.
4. A. L. 바스토(Anne Llewellyn Barstow), 『Witchcraze: A New History of the European Witch Hunts』, 뉴욕, 1994.
5. S. 페데리치(Silvia Federici), 『Caliban et la sorcière. Femmes, corps et accumulation primitive』, 제네바–마르세유,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