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비밀무기 기지 위에서 벌어진 극적인 탈출
1945년 2월 8일, 소련 포로 10명이 독일 우제돔 섬의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활주로에 세워져 있던 독일군 폭격기 하인켈 He 111을 납치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들의 지휘관은 전투기 조종사 출신 미하일 데비야타예프였다. 그런데 비행기를 띄우던 이들은 자신이 실은 것이 제3제국 최고급 기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극적인 탈출은 독일군에 큰 충격을 안겼다. 수용소 경계를 책임졌던 이들은 처벌받았고, 소장은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히틀러 본인이 데비야타예프를 '개인적인 적'으로 규정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독일군은 탈취당한 항공기를 추적했지만, 조종사는 적을 교묘히 따돌렸고 결국 붉은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 무사히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데비야타예프에 앞선 선구자들
데비야타예프와 동료들의 위업이 유일한 '비행기 탈출' 사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약 10명의 조종사가 같은 방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다만 공식 선전은 그들의 이름을 철저히 숨겼다. 스탈린 시대의 해석에 따르면 포로가 된 모든 소련 국민은 반역자로 간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기 진영'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한 조종사들조차 '인민의 적' 취급을 받으며 국영 언론에 단 한 번도 언급될 자격이 없었다.
그 영웅적인 조종사 중 한 명이 니콜라이 로샤코프 소위였다. 그의 비행기는 1943년 5월 27일 적에게 격추됐고, 그는 낙하산으로 탈출해 목숨을 구했다. 이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그는 동료들과 함께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만, 누군가 계획을 독일군에 밀고했다. 독일군은 로샤코프에게 협력을 종용했다. 그는 적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신뢰를 얻은 뒤 비행기를 납치해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니콜라이는 프스코프 지역의 비행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거기서 또 다른 소련 포로이자 정비병인 이반 데니슈크 중사를 만났다. 그 역시 탈출을 꿈꾸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활주로 위에 조종사 없이 세워진 경량 쌍발기를 발견하고 몰래 기체에 올라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니즈니노브고로드 지방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탈주자들을 기다린 것은 영광이 아니라 심사용 수용소였다. 혹독한 고문 끝에 데니슈크는 조국 배반을 자백하고 말았다. 1943년 12월 4일, 정비병은 강제노동수용소 20년형을, 로샤코프는 3년형을 선고받았다. 전자는 1951년에, 후자는 1945년에야 석방됐다.
위험천만한 계획
미하일 데비야타예프는 1944년 7월 13일 포로가 됐다. 그는 베테랑 조종사였다. 전쟁 첫날인 1941년 6월 22일부터 전투에 참전했고, 이틀 뒤인 6월 24일에는 이미 독일기를 격추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다리에 중상을 입었지만 긴 요양 끝에 전선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포로가 된 날까지 그의 격추 기록은 무려 9대였다.
처음에 그는 우치 근교 루다 파비아니츠카의 수용소로 이송됐고, 이후 작센하우젠으로 옮겨졌다. 원래 그는 그곳에서 총살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수용소 동료들이 죽은 포로, 교사 그리고리 니키텐코의 신분표를 넘겨주면서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 데비야타예프는 이 이름으로 우제돔 섬 카를스하겐 1호 수용소에 수감됐다. 그 근처에는 독일이 V1·V2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페네뮌데 연구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로운 수용소에서 미하일은 크리보노고프 중위와 포병 블라디미르 소콜로프와 친분을 쌓았고, 두 사람은 그를 자신들의 탈출 계획에 끌어들였다. 원래 계획은 배로 우제돔 섬을 빠져나가는 것이었지만, 데비야타예프는 대신 비행기 납치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 실행
데비야타예프, 소콜로프, 크리보노고프는 차츰 신뢰할 만한 동료 포로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대상은 비행장 안이나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미하일 본인도 수명이 다하거나 심각하게 손상돼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비행기들이 모여 있는 곳을 자주 드나들며 조종실 장비를 익혀 나갔다.
1945년 2월 8일 아침, 며칠간 이어진 비가 그치고 마침내 해가 떠올랐다. 좋은 가시거리를 기대할 수 있는 날씨였다. 데비야타예프와 동료들은 비행장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정비사들이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간 사이, 크리보노고프가 경비병을 처리했고, 그와 데비야타예프는 활주로 위의 하인켈 He 111에게 다가갔다. 조종사는 자물쇠를 뜯어내고 조종석에 올랐고, 크리보노고프는 엔진 덮개를 열었다. 그런데 비행기에는 배터리가 없었다. 일행은 몇 분 만에 배터리 카트를 찾아내 폭격기까지 끌고 왔다. 모두가 기체에 올라탔고, 데비야타예프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우리 집에 갑니다."

하지만 미하일은 이륙하는 데 애를 먹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가 이런 대형 폭격기의 조종석에 앉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번째 시도 끝에야 이륙에 성공했고, 시각은 낮 12시 15분이었다. 독일군은 폭격기를 추격했지만 하늘에서 기체를 찾는 데 실패했다. 인근의 다른 독일 비행장들에도 탈출 사실이 통보됐지만, 소련 포로들은 운이 좋았다. 그들은 무사히 '자기네들' 곁에 착륙했다.
영광 대신 의심
데비야타예프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회상했듯이, 소련에서는 "나와 내 친구들을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독일이 그들을 스파이로 재교육해 소련에 보냈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행 전체가 반역죄로 기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독일 폭격기에 실려 있던 V1·V2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극비 장비였다(안타깝게도 이 장치들의 세부 사항은 소련 측에서 끝내 해금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미하일 데비야타예프는 기술자들과 군인들을 동행시켜 우제돔 섬으로 직접 향했다.
데비야타예프와 동료들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은 1957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들은 국가 훈장을 수여받았고, 조종사 데비야타예프 본인은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참고 자료
- V. 즈뱌긴체프, 『파시스트 포로 수용소에서의 믿기 힘든 탈출 사건들』
- D. 오쿠네프, "지옥에서의 탈출: 조종사 데비야타예프는 어떻게 파시스트의 비행기를 훔쳤는가"
- M. 체레파노프, 『데비야타예프 위업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