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 9일, 온 세계의 시선이 폴란드로 향했습니다. 포메라니아의 작은 마을 카를리노에서 기둥처럼 솟아오른 석유 불꽃이 하늘을 찢었고, 언론은 공산 폴란드를 '새로운 쿠웨이트'라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관심은 유정의 불꽃처럼 빠르게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타오르는 행운
1980년 12월 9일은 카를리노 시추장에게 평범한 근무일이었습니다. 이 단계까지 귀중한 유전을 발견하리라 믿는 직원은 많지 않았지만, 카미엔포모르스키 시추센터의 계산에 따르면 사업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경, 매장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제는 누군가 약 200미터나 잘못 계산했다는 점이었고, 이 실수는 네 명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뻔했습니다.
지하의 '검은 금' 호수는 지표면에서 약 3,000미터 깊이에 있다고 추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릴 비트가 지하 약 2,800미터 지점에 도달했을 무렵, 다셰보 1번 시추 장비의 한 작업자가 이상 징후를 알아챘습니다.
시추 진흙(머드), 즉 절삭물을 씻어내고 드릴 비트를 식히는 데 쓰이는 물질이 지상으로 밀려 올라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언가가 강한 압력으로 그것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현장 인력들은 제때 상황을 파악하고 대피했습니다. 불타는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을 때 사람들은 이미 물러난 뒤였습니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네 명이 화상을 입어 병원에 실렸습니다.
카를리노 의용소방대는 오후 5시 15분에 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화세는 지역 소방대의 초라한 장비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했습니다. 화염의 온도는 섭씨 1,000도에 달했고, 주변 건물들에도 불이 옮겨붙었습니다. 저녁 무렵에는 이미 18개 소방대가 시추장에 도착했고, 사건의 규모는 수도 바르샤바까지 전해졌습니다.
다셰보 1번 유정에서 치솟는 분출.
다음 날에는 군과 공민민병을 포함해 1,000명 이상이 진화 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국영방송 TVP는 카를리노의 진화 작업을 메인 뉴스로 내보냈고, 레흐 바웬사도 현장을 찾았습니다. 그는 훗날 기자들에게 "영원히 흘러나가 버리는 석유를 생각하면 울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분출은 분명한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희망의 숨결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쿠웨이트'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고, 공산주의 폴란드의 밝은 미래와 석유 부가 예언되었습니다. '카를리노' 광산센터장 카지미에시 야쿠보비치는 훗날 라제치포스폴리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일종의 히스테리였습니다. 고압으로 분출하며 타오르는 석유의 인상적인 광경이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TV로 보기에 불길이 너무나 장관이라, 거의 모든 사람이 이곳이 우리의 쿠웨이트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화염을 향한 포격
사실 폴란드는 석유 산업의 선구자 이그나치 우카시에비치의 업적 덕분에 유럽 석유 산업에서 이미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렇다면 '액체 금' 매장지라는 몫을 받아야 했을까요? 어쨌든 하나는 분명했습니다. 100미터 하늘 높이로 치솟는 간헐천 같은 불기둥은 정말 장관이었다는 것. 하지만 그 뒤에 헤아릴 수 없는 부가 약속되어 있었을까요?
세계 각지의 기자들은 잠재적 이익과 손실을 계산했고, 헝가리와 소련에서 증원 병력이 폴란드로 향했습니다. 손상된 프리벤터(방류 방지 장치)를 제거해야 했는데, 이 작업이 워낙 어려워 극단적인 조치가 동원되었습니다. 바로 포탄이었습니다. 폴란드 인민군(LWP) 포병 부대는 152mm 곡사포를 사용했습니다(이전에는 더 작은 포가 사용되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총 232발의 포탄이 발사되었습니다.
사진: EAST NEWS / SIPA PRESS
카를리노 석유 폭발. 시추 시험 중 자연 발화가 일어났다, 1980년 12월 9일
진화 작업은 연휴 내내, 그리고 새해까지 이어졌습니다. 동쪽 국경 너머에서는 레온 칼리나 기사가 이끄는 팀이 도착해 AGWT 소화 장치, 즉 차량에 탑재된 미그-17 전투기 개조 터보젯 엔진을 운용했습니다. 그 추력은 물대포와 거품 분사 장치와 결합했을 때 불꽃을 누를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월 10일에야 루마니아에서 가져온 11톤짜리 장치가 유정 입구에 설치되면서 불은 마침내 완전히 꺼졌습니다.
약 3만 톤의 원유와 5,000만 입방미터의 천연가스가 타버린 것으로 추산됩니다. 진화 작업과 공사에 든 총비용은 3억 즐로티였습니다. 값진 경험을 얻은 폴란드인들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1월 16일, 780톤의 원유를 실은 첫 유조선들이 카를리노를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원유는 평범한 품질이었고, 석유에 대한 관심은 비눗방울처럼 터져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계산에 따르면 매장량은 매우 적었습니다. 불이 며칠 더 타올랐다면 꺼낼 것이 남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채굴은 결국 1983년에 종료되었습니다.
화재에 대한 조사 역시 빠르게 잦아들었습니다. 크게는 사망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안국(SB)은 예지 치시의 보고서를 근거로 석유 탐사 과정의 비리를 확인할 비밀 협력자를 영입했지만, 훗날 그 보고서 전체가 조작된 것이며 예지 치시라는 인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폴란드가 석유 강국이 될 가능성도 그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참고 자료
저희 사이트는 과거의 흥미로운 일화와 놀라운 세부 사항, 옛 신문에 실린 기이한 소식 등 짧고 알찬 이야기를 다룹니다. 읽는 데 3분이면 충분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아고라 출판사에서 출간한 마치에이 시엠비에다의 소설 <감빗>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