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히틀러를 '아프리카의 구세주'라 칭송한 피비린내 나는 독재자

수십 년간의 식민지배 끝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더 나은 내일을 꿈꿀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견뎌온 백인들의 만행은, 토착 독재자들이 저지른 야수 같은 잔혹함에 비하면 오히려 온화한 수준이었다. 수많은 해방의 영웅들이 권력을 잡고 도적으로 변해갔다. 그중 단연코 악명 높은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ías Nguema)였다.

‘아프리카 분할 경쟁’은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대륙의 운명은 사실상 ‘선착순’ 방식으로 나뉘어갔다. 베를린 회의가 세력권 분할을 최종 확정하면서 금, 다이아몬드, 코코아, 석유 등 천연자원에 대한 잔혹한 착취의 시대가 열렸다. 식민주의는 아프리카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이 질서는 1950~6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식민주의의 멍에를 벗어던졌다고 해서 원주민들에게 안도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은 채 실현되기도 전에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

권력을 쥔 잔혹한 정신병자

적도 기니는 19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초대 대통령이 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미친 자이자 극단적 배외주의자로, 단 몇 년 만에 나라를 대규모 경제 붕괴로 몰아넣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인구의 4분의 1이 살해되었는데, 주요 희생자는 지식인, 의사, 공무원 등 ‘국가의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었다. 잠재적 반역자 한 명을 없애기 위해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릴 정도였다.

히틀러를  아프리카의 구세주 라 칭송한 피비린내 나는 독재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그랬듯 마시아스는 스페인인들에 대한 집착적인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의 공격적인 정책으로 약 7천 명의 스페인인이 국경을 넘어 떠났고,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조차 자국민을 그 자리에 남겨두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할 지경이었다.
그의 광기는 이미 마드리드에서 열린 독립 협상 회의에서 드러났다. 마시아스는 회의장에서 나치즘을 향한 열정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제 생각에 히틀러는 아프리카의 구세주입니다(…) 그는 전 세계의 식민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유대인을 박해했다고들 하지만, 그의 진짜 의도는 식민주의와의 투쟁이었고, 오해를 받았을 뿐입니다.”

회의장이 발칵 뒤집히고 청중이 당황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적도 기니 국민들이 이 연설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시아스가 독립 투쟁에 헌신했고, 웅변에 능했으며, 선거 운동에서 수많은 약속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그래서 첫 선거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1969년 마시아스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미치광이로 불렸습니다. 언제 미쳤다는 말입니까? 제 유일한 미친 짓은 자유를 향한 미친 짓이었고, 자유를 쟁취한 지금 그 광기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마시아스는 스스로도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몰래 정신 검사까지 받았지만, 그렇다고 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독재자들의 땅』이라는 책에는 이 독재자의 일상이 섬뜩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시아스는 늘 그렇듯 홀로 저택을 배회하며 희생자들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고함을 지른다. 그 곁에는 인간 두개골 컬렉션이 놓여 있는데, 그는 이 두개골들이 자신에게 축복을 내릴 것이라 믿고 숭배했다.(…) 최근에는 하인들에게 여덟 명의 손님을 위한 식탁을 차리라고 명령한 뒤, 홀로 앉아 죽은 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권력을 잡은 뒤 그는 갈수록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갔다. 대마초와 이보가(iboga)라는 강력한 환각성 음료에 빠져든 탓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축구 경기장에서 정치적 반대파 150명을 집단 교수형에 처했고, 처형은 신나는 음악과 함께 진행되었다.

히틀러를  아프리카의 구세주 라 칭송한 피비린내 나는 독재자

'스페인 올리브' 소지죄로 처형대에

“수도 말라보 동쪽 끝의 스페인풍 저택에서 라이문도 주니어는 열한 명의 형제자매 곁에서 잠들어 있다.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그는 깊이 잠들어 있지만, 옆방의 아버지는 잠 못 이루고 경계하고 있다. 고위 관리였던 그는 대통령의 몇몇 행보를 직접 목격했고, 자녀들과 네 명의 아내를 지키는 일은 끊임없는 공포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 라이문도 엘라 응베가 이미 처형 대상 명단(list de asesinados)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지배층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방어막이 되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벌써 석 달째 명단에 적혀 있다.”

그 명단에 오르는 기준은 터무니없이 자의적이었다.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 혹은 스페인인에게 우호적이라는 의심만으로 충분했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나눈 무심한 사교성 대화조차 감옥행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체포 사유는 스페인 신문이나 책을 소지한 것, 심지어 부엌에 둔 올리브나 스페인산 소시지 한 접시까지도 충분했다.

적도 기니의 민병대는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았다. 감옥에서는 만행이 일상이었다. 수감자들은 고문당하고 구타당했으며, 가장 흔한 처형 방식은 몽둥이로 산 채로 구타해 죽이는 것이었다. 음모자로 지목된 이들의 재판에서 변호인 역할을 맡은 변호사의 임무는 오로지 사형을 구형하는 것뿐이었다(실화다!). 『독재자들의 땅』에는 감옥에 끌려간 여덟 살 아이의 증언이 남아 있다.

“그곳은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희미한 빛이 벽 위쪽의 좁은 틈으로만 스며들 뿐이었습니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알몸인 채, 배설물로 오염되고 해충이 들끓는 감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소년은 구타로 숨을 거둔 수감자의 시신 처리를 돕도록 명령받았다.

군인들은 가족들을 감옥으로 불러들여, 밤마다 수감자들이 모닥불 앞에서 춤추도록 강요당하는 광경을 구경거리로 삼기도 했다.

“힘이 다하면 그들은 비틀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했고, 군인들은 불에 달군 쇠못으로 그들을 찌렀습니다. 누군가 쓰러질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모두가 탈진으로 반쯤 의식을 잃은 채 간신히 몸을 지탱했고, 군인들은 그들을 조롱하며 달군 쇠붙이로 몰아세웠습니다.”

1979년, 유엔은 마시아스 정권을 공식적으로 규탄했다. 같은 해 대통령은 자신의 친족 여럿을 처형했고, 이것이 그의 몰락을 불러왔다. 어디에서나 위협을 감지하고 밖의 모든 이를 의심하던 통치자는, 결국 자신의 혈육의 손에 쫓겨났다. 역설적이게도 사촌이 쿠데타를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나라의 파탄이나 국민에 대한 만행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시아스는 아프리카가 겪어야 했던 비극 중 단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콩고, 짐바브웨, 리비아, 나이지리아의 주민들도 비슷한 악몽을 겪었다.

출처

이 글은 폴 케년(Paul Kenyon)의 『독재자들의 땅: 아프리카를 약탈한 사람들』(Jagiellonian University Press, 2019)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