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8세는 궁정인들에게 못 박힌 뒤 둔기로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손님을 노린 독약을 잘못 마셨고, 요한 10세는 베개에 눌려 질식사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성 베드로의 후계자들은 어떤 최후를 맞았을까요?
요한 12세는 교황이 갖춰야 할 덕목과 정반대의 삶을 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955년에 공로나 영성이 아니라 오직 인맥 덕분에 성 베드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차피 18세 나이에 어떤 업적을 쌓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 심각한 문제는 그의 생각이 신성하기는커녕 철저히 세속적이었고, 때로는 악마적이기까지 했다는 점입니다.
교황궁은 사실상 매춘굴로 변했습니다. 그는 피로 물든 음모에 깊이 연루되었고, 뼈를 자르며 이교의 신들에게 기원했습니다. 평소 십자 성호를 긋기를 꺼렸다는 점에서 실제로 이교를 숭배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그리고 그는 결혼한 정부의 침실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확한 죽음의 경위는 불분명합니다. 한 설에 따르면 27세의 젊은 교황이 성관계 도중 발작으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은 정부의 남편의 손에 죽었다는 주장입니다. 어느 쪽이든 근본적인 질문은 남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교황으로 불리는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였을까요, 아니면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의 결과였을까요?

교황권 몰락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둔 알렉산데르 6세 보르자입니다.
독약과 말라리아 사이
교황사에는 이런 의문투성이의 죽음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죽음이 기밀스럽게 여겨져도 제3자가 배후에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고, 살해로 추정되더라도 공격의 증거를 찾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공격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실수'였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악명 높은 알렉산데르 6세 보르자(1503년 사망)입니다. 그는 경건함이 가장 결여된 교황 순위에서 요한 12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인물이었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말라리아로 알려져 있지만, 점심 식사를 위해 방문한 추기경 중 한 명을 저격하기 위해 준비된 독약을 본인이 우연히 마셨을 개연성도 있습니다!
우르바노 6세(1389년 사망) 역시 독약의 희생자가 되었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추기경들을 감옥에 넣고 고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이 공격적인 편집증 환자에게는 워낙 원한을 산 상대가 많았기 때문에, 독살설은 충분히 그럴듯합니다.
클레멘스 2세(1047년 사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942년 그의 무덤이 개장되어 조사되었고, 분석 결과 납 화합물에 의한 중독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교황이 해로운 물질을 일종의 약으로 복용했거나, 초산납으로 단맛을 낸 포도주를 과량 마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클레멘스 사망 1년 뒤 급서한 다마소 2세의 경우에도 독약설이 거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말라리아가 더 유력한 사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포르노크라시 시대의 살해 명령
독약만으로는 부족할 때도 있었습니다. 서기 882년, 궁정인들은 요한 8세를 먼저 못 박은 뒤 둔기로 내려쳐 죽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검은 연쇄'의 시작이었습니다. 3년 뒤 하드리아노 3세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사망했고, 2년 뒤 스테파노 6세의 죽음에서는 더 이상 모호함이 없었습니다.
이 교황은 자신의 숙적이었던 포르모소 교황의 시신을 발굴해 교황 의복을 입힌 채 재판에 회부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선고된 형벌은 고인의 시신을 훼손해 티베르 강물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참을 수 없는 대욕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스테파노 6세를 유폐시켰고, 이후 누군가 감방에서 그를 목졸라 죽였습니다.

스테파노 6세는 교황사상 가장 소름 끼치는 쇼, 즉 전임자 포르모소의 시신 재판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10세기, 소위 '포르노크라시'라 불리는 시대를 여는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이 시기 성 베드로의 자리는 교황의 정부들과 궁정 파벌의 음모에 걸린 판돈이 되었고, 시신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교황 레오 5세는 축출되어 감금된 뒤 904년 더 이상 골칫거리로 남지 않도록 살해되었습니다. 요한 10세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928년 권력에서 쫓겨난 그는 왕좌 탈환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929년 베개로 목이 졸려 사망했습니다.
그의 살해 배후에는 마로치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교황과 잠자리를 함께하고, 다른 교황을 죽이고, 또 다른 교황을 직접 옹립한 시대의 '검은 맘바'였던 그녀가 세운 교황이 바로 친아들, 즉 요한 11세라는 이름을 취한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는 마로치아의 전 빈객이었던 스테파노 7세 교황의 수상한 죽음 이후 벌어진 일입니다. 결국 그 독사 어미와 꼭두각시 아들마저 축출되어 서기 936년 세상을 떠났는데, 누군가 그들의 최후를 '도왔을' 개연성이 큽니다.
베네딕토 6세(974년 사망)도 포르노크라시 시대에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권력에서 축출된 그는 후임자의 명령에 따라 목졸림으로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로 물든 포르노크라시 시대의 마지막 교황 중 한 명이 서두에서 소개된 요한 12세였습니다. 그의 죽음 역시 또 하나의 기묘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테파노 7세 사후, 마로치아는 수상한 정황 속에서 요한 11세라는 이름을 취한 자신의 아들을 교황좌에 앉혔습니다.
포르노크라시의 종말(966년 폴란드 세례가 거행된 요한 13세의 통치기와 시기가 일치합니다)이 교황 제거 수단으로서의 암살을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984년, 폐위되어 감옥에 갇힌 요한 14세의 죽음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탈진으로 죽었는지, 혹은 — 무슨 이유에서든 — 독살로 죽었는지가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일곱 번째가 될 뻔한 교황
이 모든 사례와 의문점을 종합하면, 적어도 여섯 명의 교황이 공격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클레멘스 2세, 요한 8세, 스테파노 6세, 레오 5세, 요한 10세, 베네딕토 6세가 그들입니다. 살해 수법은 검증된 방식이었습니다. 주로 독약과 질식, 그리고 간헐적인 구타였습니다.
반면 1145년 루치오 2세의 죽음은 전혀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객의 희생자였다면, 그 자객은 비범하게 정확한 눈과 숙달된 손을 지닌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농성하던 반란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지지자들을 이끌던 교황은 돌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겉보기에는 폭동 중에 일어난 죽음으로 보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초기 수백 년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루치오 2세의 경우 주목할 새로운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군중 속에서의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입니다. 이는 교황에게 지극히 드문 형태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운명은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도 닥칠 뻔했습니다.

루치오 2세는 카피톨리노 전투 중 돌에 맞아 며칠간의 고통 끝에 부상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16세기 독일 미니어처에는 이 교황의 발치에 선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노르베르트 폰 크산텐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결국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일반 알현 도중 총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최근 야체크 타치크의 저서 『암살. 요한 바오로 2세 — 1981년 5월 13일. 음모. 수사. 고백』에서 다뤄졌습니다. 저자가 인터뷰한 20여 명의 증언을 통해 이 극적인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목격자와 의사, 수사관, 요원들뿐 아니라 총격범 본인인 알리 아자까지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폴란드 출신 교황을 노린 마지막 시도는 아니었습니다. 1년 뒤인 1982년 5월 12일, 파티마 순례 중에 성 피오 10세 사제회에서 활동하던 후안 마리아 페르난데스 이 크론 신부가 그를 공격했습니다. "교황 물러가라!"를 외치며 총검으로 달려든 이유는 그가 요한 바오로 2세를… 소련의 스파이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번 위기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자객의 손에 죽은 일곱 번째 교황이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