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가 숨긴 어두운 비밀, 강제수용소의 역사

차분하고 절제된 성격으로 유명한 핀란드인들, 산타클로스(성 니콜라스)의 고향으로 불리는 이 나라에는 어두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도 무시무시한 강제수용소가 실재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강제수용소"라는 표현은 폴란드인들을 격분시킨다. 폴란드 영토에서 포로들을 학살하고 고문한 것은 독일인이었으며, 폴란드의 동의나 협조는 전혀 없었다고 정확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핀란드에게는 그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핀란드인이 핀란드인에게 내린 운명

폴란드인과 마찬가지로 핀란드인에게 가장 큰 적은 지리적 위치였다. 러시아 제국과 동군연합 관계에 있던 이 나라에서는 독일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충돌하며 정세가 불안정해졌다. 차르는 먼저 가차 없는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했다.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가 숨긴 어두운 비밀, 강제수용소의 역사

핀란드 수용소의 러시아 고아들 (색상 복원: 라파우 쿠작)

이후 1차 세계대전 중 핀란드가 독립을 되찾고 내전(1918년 1월 27일~5월 15일)에 휘말리자, 볼셰비키는 공산주의 계열인 '적위대'를 지원했다. 결국 백위군이 승리했고, 패배한 상대편의 운명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가 숨긴 어두운 비밀, 강제수용소의 역사

1918년 핀란드 적위대. 전투 당시 그들은 종전 후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을 예감하지 못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살아남은 적군 핀란드인들은 인근 소련으로 도피했다. 도피하지 못한 이들은 무자비한 숙청의 희생양이 되었다. 내전에서 '잘못된 편'을 선택한 수만 명의 시민이 강제수용소에 갇혔으며, 약 8만 명이 수용소행을 당했다.

백색 테러로 목숨을 잃은 적군이 전장에서 죽은 병사보다 많았다. 핀란드인들은 여성도 어린아이도 가차하지 않았다.

백군 총사령관이자 국민적 영웅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처형자", "학살자" 같은 악명 높은 별명을 얻었다. 그의 전기 작가 조나단 클레멘스에 따르면 쿠데타에 대한 대가로 8,000명의 공산주의자가 총살되었으며, 364명의 여성과 무려 58명의 어린이가 살해되었다.

포로 수용소에서는 단 넉 달 만에 1만 1천 명이 사망했다. 수용소 안에는 극심한 기근이 들어 포로들은 문자 그대로 모든 식물에 달라붙었다. 실로 짐승과 같은 상황이었다. 수용자 빌요 소카넨은 이렇게 회상했다.

한 포로가 집에서 보낸 소시지 한 꾸러미를 받았다. 그는 그것을 다 먹치고는 큰 덩어리로 토해냈다. 그러자 다른 포로들이 즉시 그 토사물에 달려들었다.

포로들이 지옥을 경험하는 동안, 내전이 끝난 다음 날 승리자 만네르헤임은 말을 타고 헬싱키 거리를 행진했다. 환호하는 군중이 말발굽 아래 흰 꽃잎을 던지며 화려한 개선식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굶주린 러시아인들

20년 후, 핀란드는 다시 한번 파괴적인 전쟁에 휘말렸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련-핀란드 분쟁은 두 차례 일어났다. 스탈린은 어떤 의도로든 눈에 띄지 않는 이웃나라의 저항을 꺾지 못했다. 작지만 강인한 민족이 몇 배나 강한 적에게 맞서 성공적으로 버텨낸 것이다.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가 숨긴 어두운 비밀, 강제수용소의 역사

탬페레 시내 광장에 끌려온 붉은 핀란드인 포로들. 통계상 열 명 중 하나는 포로 생활을 생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핀란드가 승리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포로의 수도 늘어갔다. 겨울전쟁에서 약 5,700명, 계속전쟁에서 약 6만 4천 명의 적군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첫 번째 분쟁의 포로들은 이후 벌어진 일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들 중 중상자나 환자 135명만이 사망했다. 반면 계속전쟁 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의 처지는 훨씬 열악했다.

우선 핀란드인들은 포로의 숫자에 놀랐다. 그래서 급하게 30개가 넘는 새로운 수용소를 지어야 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지어진 시설들이 수천 명의 포로를 수용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할 리 없었다. 자원이 부족한 국가에게 충분한 관리 인력과 식량 보급 확보 역시 거대한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핀란드인들은 포로 일부를 석방하는 대신 오히려 새로운 포로를 찾아나섰다. 심지어 민간인들까지도.

노인, 여성, 그리고 아이들

계속전쟁 중 핀란드가 소련령 동카렐리야를 점령하자 현지 주민들에게 진짜 악몽이 시작되었다. 20년 전 만네르헤임의 동포들이 '부역자'로 몰린 동포들에게 안겼던 것과 같은 지옥이었다.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들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가 숨긴 어두운 비밀, 강제수용소의 역사

2차 세계대전 중 핀란드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

기근과 질병으로 이들은 수천 명 단위로 죽어갔다. 동카렐리야에는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았고, 그중 러시아인 인구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핀란드의 점령 이후 슬라브계 주민의 약 3분의 1이 철조망 뒤로 갇히고 말았다.

점령지의 식량 배급 방식은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와 놀랄 만큼 비슷했다. 비스와강 유역에서 독일이 정한 식량 배급량은 인종에 따라 달랐다. '열등한 인종'으로 분류될수록 배급은 줄어들었다. 핀란드도 비슷한 발상을 했으나, 이 나라에서 최악의 대우를 받은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이었다. 비록 그들의 영토에 죽음의 산업이나 '최종 해결'에 해당하는 체계는 없었지만, 1941~1942년 겨울 수용소 포로 7명 중 1명이 굶어 죽는 일에 대해 별다른 마음의 짐을 느끼지 않았다.

핀란드는 공식적인 동맹 조약은 없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제3제국의 동맹국이었다. 이 협력 때문에 핀란드 영토에는 또 다른 종류의 수용소가 존재했다. 바로 독일이 지은 수용소였다. 울라 세이토넨과 베사-페카 헤르바가 핀란드 라플란드의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관한 연구에서 밝히듯, 히틀러의 병사들은 이 나라 북부의 약 1,000km에 달하는 전선을 담당했고, 그 과정에서 100개의 수용소를 건설해 약 3만 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가 숨긴 어두운 비밀, 강제수용소의 역사

1942년 페트로파블롭스크 제5수용소를 시찰하는 독일 동맹군을 안내하는 핀란드인들

전쟁 포로들은 주로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페차모에서 로바니에미까지 이어지는 철도 건설 등에 동원되었다. 극북의 동화 같은 마을 엽서를 볼 때, 그곳이 산타클로스와 엘프, 순록만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근처 수용소에서 고통받다 죽어간 수천 명의 전쟁 포로들도 함께 있었던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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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비아트 큰시아츠키(Świat Książki) 출판사에서 출간된 카티아 케투(Katja Kettu)의 소설 『산파』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인공 크시베 오코는 연인인 독일 장교를 따라 포로수용소에서 일하기 위해 자원한 핀란드 여성이다. 카티아 케투는 독자에게 2차 세계대전 전후 라플란드의 삶이 어떠했는지 이해할 특별한 기회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