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평등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18세기 철학자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인류를 최초로 '인종'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생각했던 인종 개념은 19세기에 등장한 '인종차별'과는 전혀 다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성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에 지식인들은 어떻게 인간 평등을 옹호하면서도 사람들을 인종별로 분류하기 시작했을까? 역설처럼 보이지만, 위트레흐트 대학교의 문화사학자 데빈 바르티야(Devin Vartija)는 이 병행적 발전을 연구한 결과 결코 역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해답은 19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정한 위계질서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18세기의 중요한 문화 운동인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것이 지배적인 사상이었다. 사회의 위계는 신이 정한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었다. 정점에는 신의 대리자인 왕이 있고, 그 아래 성직자와 귀족이, 맨 아래에는 사회 대다수를 이루는 평민이 있었다. 서로 다른 법체계를 적용받는 등 집단 간 차별은 흔한 일이었으며, 자신보다 위계가 높은 사람의 말이 더 큰 무게를 가졌다. 불평등하고 고통스러운 삶은 단순히 인간의 죄스러운 본성의 결과이자 신이 내린 벌로 여겨졌다.
계몽 철학자들은 이러한 관행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찻집과 살롱에 모여 다른 대안들을 논의하고 책을 저술했다. 바르티야는 "평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대부분은 남성에게만 적용되는 평등을 의미했다. 하지만 법 앞의 평등 없이는 정의로운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고 말한다.
부유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시민층이 늘어나면서 이러한 사상과 책들은 점점 더 넓은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불평등은 점차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고, 결국 1789년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호로 내건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바르티야는 "연구에서는 주로 왕과 귀족이 권력을 쥐고 이 논쟁이 가장 치열했던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살폈다.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부유한 시민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논쟁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컸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기후가 만든 외모
그러나 이러한 평등 사상과 나란히, 같은 계몽 사상가들이 인류를 처음으로 인종별로 분류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바르티야는 이를 반박한다. "철학자들은 인간을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보았다. 그들에게 사람들 사이의 외적 차이는 서로 다른 기후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예컨대 철학자 뷔퐁(Buffon)은 아프리카인의 피부가 검은 이유를 아프리카의 극심한 더위 탓으로 보았다. 따라서 스페인인은 아프리카인보다 밝았고, 독일인은 더욱 하얗다는 논리였다. 햇볕이 적으면 색소도 적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지구와 지구상 생명체의 나이마저 의문시하게 만들었다. 자연이 사람의 외모에 영향을 준다면, 성경이 제시한 6천 년이라는 역사는 결코 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명인인가, 아니문가?
계몽주의 이전에도 사상가들은 유럽 밖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글을 썼지만, 그 기준은 피부색이 아니라 종교나 문명화의 정도였다. 반면 중국인은 매우 문명화된 존재로 평가받았고, 때로는 유럽인보다 더 문명적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계몽 철학자들에게 유럽인이 승자로 부상한 이유는 유리한 환경 조건 덕분이었다. 누구나 같은 유리한 조건 속에 산다면 유럽인이 이룬 것을 충분히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인종을 불평등의 정당화 근거로 삼지 않았다고 바르티야는 밝혔다. 인류를 여러 인종으로 나눈 것은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 발전을 그 안에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였다. 외적 특징이 사람을 열등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물론 일부 사상가들은 특정 인종을 판단하기도 했다. 바르티야는 "어떤 인종은 야만적이고 추하며 뒤떨어진다고 묘사했다. 인종에 대한 부정적 연상은 이미 18세기에도 존재했다"고 말한다.
노예제의 핑계가 된 인종
우리가 아는 형태의 인종차별, 즉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관념은 바르티야에 따르면 19세기 미국의 노예제가 낳은 직접적인 결과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1787년 헌법에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명문화했다. 그런데 노예를 부리는 것은 이와 모순됐다. 그럼에도 남부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에게 노예는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으로 외양을 불평등의 정당화 근거로 사용했다. 어두운 피부의 아프리카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명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담은 헌법은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계몽주의 시대의 인종 분류를 다시 끌어내 활용했다. 외적 특징을 근거로 아프리카인을 평등 원칙이 적용되는 집단에서 배제한 것이다. 반면 계몽 사상가들은 인종을 불평등의 정당화 수단이나 설명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인종차별의 기원이라고 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며 변모한 것은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독서를 통해 자란 공감
바르티야는 연구를 위해 세 백과사전의 텍스트를 면밀히 분석했다. 에프라임 체임버스(Ephraim Chambers)의 『사이클로피디아(Cyclopaedia)』,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와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의 『백과전서(Encyclopédie)』, 그리고 포르투나토 바르톨로메오 데 펠리체(Fortunato Bartolomeo De Felice)의 『이베르동 백과전서(Encyclopédie d'Yverdon)』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18세기 초부터 말까지 프랑스, 영국, 스위스의 계몽 사상가들을 조명했다. 바르티야는 "백과사전은 당시 중요하고 점점 인기를 끌던 자료였다. 참고 도서이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뷔퐁의 저작은 엄청난 인기를 얻어 18세기 후반 프랑스 개인 서고 5위 안에 들었다. 독서야말로 평등 사상이 널리 확산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다른 문화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다룬 책은 독자들 사이에 그 집단에 대한 공감을 키워줬다." 하지만 모두가 계몽 철학자들과 그들의 획기적인 인간 역사관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교회의 반발이 컸다. 그리고 길거리의 평범한 사람들은 아예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바르티야는 생각한다. 그들은 차라리 하루하루의 생존에 몰두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