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칸트 전통의 '체리피킹', 철학과 심리학을 갈라놓은 잊혀진 역사

철학자 칸트와 심리학은 한 문으로 나란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이미지로, 그 원인 중 하나는 19세기에 벌어진 방법론 논쟁에 있다. 피터 슈페르베르(Peter Sperber)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이 논쟁의 패자들에게 역사 속 제 자리를 돌려주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서양 근대 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이 독일 철학자는 인간 정신과 감각 지각의 작동 방식에 대한 사유에 혁명을 일으켰다. 칸트는 자신의 저술에서 당시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지 못했던 심리학을 폭넓게 활용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터 슈페르베르는 6월 21일, 칸트의 저작과 칸트주의 전통 속에 나타난 심리학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한다. 그의 논문은 칸트 저작에 대한 기존의 반(反)심리학적 해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잊혀진 패자들

“칸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철학자는 공간·시간·인과성이 인간과 무관하게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것들은 인간 정신이 무한히 복잡한 감각 경험 속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형식입니다. 이러한 형식이 없다면 우리의 지각은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남을 것입니다.” 슈페르베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그는 칸트가 인간 정신에 관한 이론을 세우면서, 훗날 심리학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갖가지 용어와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슈페르베르에 따르면 오늘날 철학자들이 칸트는 심리학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데에는 흔한 학문 내분도 한몫했다. 철학과 심리학이 별개의 학문으로 갈라진 것은 칸트의 저작이 출간된 지 한 세기가 지난 19세기 말에야 이루어졌다. “그 세기 동안 철학 안에서 심리학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심리학은 그 패전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역사 서술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역사에서 늘 그렇듯, 승자의 시각이 곧 진실이 된다. 패자들과 그들의 이론은 배경으로 밀려났다가 결국 잊혀졌다.

모든 것은 경험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19세기 초 철학이 겪은 위기에서 시작됐다. 당시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기 위해 사유를 통한 방법과, 감각 지각에 기반한 경험적 연구라는 두 가지 길을 사용했다. 후자, 즉 심리학은 그 당시 독립된 학문이 아니었다. 자연과학이나 수학 같은 새로운 경험 과학들은 당시 철학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에 칸트의 추종자들, 즉 칸트주의자들은 심리학이 어떻게 고유한 연구 방법을 갖춘 독립적인 연구 분야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칸트 학설 속 심리학적 이론들을 체계화하려 했지만, 항상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낸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칸트주의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슈페르베르는 말한다. “심리학적 칸트주의자들은 철학 이론이 인간 정신의 작동에 대한 심리학 이론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다른 칸트주의자들은 철학에서 심리학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은 잊힌 목소리가 급진적 칸트주의자 프리드리히 에두아르트 베네케(Friedrich Eduard Beneke, 1798–1854)에게서 나왔다. 그는 철학 전체를 경험 심리학으로 대체하자는 구상을 지지했다. “그렇게 하면 철학은 몰락에서 구원되어 경험 과학만큼 성공적일 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이 입장은 역사 서술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하지만, 당시 논쟁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심리학과의 결별

슈페르베르는 이처럼 칸트 철학을 심리학과 분리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유는 단순하다. 칸트 생전에 이 두 학문은 아직 갈라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자의 대비는 19세기 중반에 비로소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철학과 심리학의 분열은 최종적으로 굳어졌다. 두 학문은 분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시켰고, 심리학은 더 이상 철학에 기여하는 유용한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바로 이를 위해 철학자들은 이미 칸트의 학설을 '체리피킹'하고 있었다.

“물론 칸트가 심리학을 비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비판은 시대정신과 분리해서 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정신을 어떻게 연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를 두고 격렬한 방법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거든요. 칸트는 자신의 이론을 심리학에 묶어 놓으면 변덕스럽게 바뀔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건 그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론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했으니까요.”

복원된 역사

칸트의 저작 안에서 심리학에 더 많은 자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슈페르베르가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부터 철학 내부에서, 그중에서도 칸트 연구에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칸트가 심리학을 멀리하고자 했다는 것이 여전히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이 논문을 통해 나는 칸트에게 심리학을 포함한 수많은 영감의 원천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칸트 학설을 하나의 일관된 프로그램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한데,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번 연구로 슈페르베르는 칸트주의 전통에 잊혀진 한 장면을 다시 그려 넣었다. “지금까지 외면당해 온 철학과 심리학 사이의 갈등은 칸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그 밖에서도 매우 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다른 철학자들과 그들의 저작을 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이 논쟁에서 심리학을 지지했는지 반대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저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문득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 가장 뿌듯했던 점은 한 학문 분야가 어떻게 스스로를 서서히 발전시켜 왔는지를 직접 지켜본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