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00년 전, 로마 군단을 피해 도피하던 유대인 무리들이 사해 연안 쿰란(Qumran) 근처의 동굴에 그들의 성스러운 경전들을 숨겨 두었습니다. 지난세기 이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예수가 살아 있던 격동의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해 사본 전시회는 7월 9일부터 1월 5일까지 네덜란드 아센(Assen)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최첨단 지층 탐사 기술을 동원해 이스라엘, 요르단, 시나이 사막을 샅샅이 뒤지며 고고학적 보물을 찾습니다. 하지만 일부 중요한 발견은 우연히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1947년, 젊은 베두인 소년들이 염소 무리를 몰고 사해 서안, 고대 정착지 쿰란 폐허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지금은 전설이 된 이야기에 따르면, 한 마리 염소가 무리에서 이탈해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동굴에 숨은 염소를 몰아내려고 소년들은 돌을 던졌고, 그중 한 개가 동굴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냈습니다. 다음 날 목동들은 가치 있는 물건이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동굴을 찾았고, 그곳에는 기묘한 문자가 새겨진 가죽 두루마리가 담긴 석항아리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수만 개의 파편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이 종교적·정치적 대혼란기를 겪던 시기의 고대 두루마리로 밝혀졌습니다. 사본들은 대체로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50년경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그리스·로마 통치자들의 억압 아래 있던 로마 속주 유대아(Judea)의 유대인들이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의 산물입니다.
20세기 중반의 학자들은 이 시기에 대해 알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의 기록 문헌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고, 유대 성경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1008년의 중세 사본(레닌그라드 코덱스)이 전부였으니까요. 사해 사본의 발견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문서의 역사적(따라서 재정적!) 가치가 명확해지자, 고고학자들과 베두인들 사이에 나머지 가죽 두루마리를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1947년부터 1956년 사이 쿰란 근처에서 텍스트가 발견된 동굴만 무려 11개에 달했습니다.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이라는 명칭은 사실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두루마리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가장 큰 것은 길이가 약 9미터에 달하는 이른바 ‘성전 두루마리(Temple Scroll)’입니다. 하지만 사해 사본의 대부분은 파편입니다. 약 천여 분의 필사본에서 나온 크고 작은 수만 개의 텍스트 조각들이지요. 이 조각들을 맞춰 놓으면 예수가 살았던 시대, 초기 유대 종교와 문화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독특한 창이 열립니다.
‘네덜란드 동굴’
이 파편들 중 일부가 아센의 드렌츠 박물관(Drents Museum)을 통해 네덜란드로 옮겨졌습니다. 이번 특별 전시의 게스트 큐레이터는 흐로닝언 대학교 쿰란 연구소 소장인 믈라덴 포포비치(Mladen Popović)입니다. 이 연구소는 1961년, 과학재단 NWO의 전신인 ZWO가 사본 연구에 100만 길더를 배정하면서 설립되었습니다. 덕분에 네덜란드는 쿰란 제11동굴 사본의 출판권을 확보했고, 그 후로 그 동굴은 ‘네덜란드 동굴’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사해 사본을 이루는 필사본의 압도적 다수는 히브리어로 작성되어 있으며, 일부는 아람어, 소수는 그리스어로 된 것도 있습니다. 이 사본들이 당시 문화를 그토록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유는, 회계 장부나 재고 목록 같은 행정 문서가 아니라 거의 전부 문학적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계율, 생활 규범, 유대 성경의 본문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극도로 취약한 사해 사본은 연간 허용량 이상의 빛(럭스)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전시 개막을 며칠 앞두고도 특별 진열장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이유로 모든 파편은 전시 중간에 다른 파편으로 교체됩니다.
관람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도록, 길이 약 1미터의 시편(Psalms) 두루마리 파편 하나가 박물관 수장고에서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이스라엘 고대유물청(Israel Antiquities Authority) 직원 한 명은 2,000년 된 텍스트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야말로 히브리어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이의 해골
“텍스트가 어떤 상황에서 동굴에 숨겨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있습니다.” 포포비치는 전시장을 둘러보며 열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해 사본만 전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기원 전후 유대인의 삶이라는 더 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과학 연구의 성과를 폭넓은 대중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기회입니다.”
“일부 텍스트는 쿰란 요새에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두루마리는 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유대인들이 쿰란으로 가져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포포비치의 설명입니다. “기원후 66년 유대 반란 발발부터 70년 성전 파괴 사이, 수많은 유대인들이 로마 군단을 두려워해 사막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들은 동굴에 자신들의 성스러운 경전을 지키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이후에도 유대아의 폭력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포포비치는 진열장에 전시된 2세기의 닳고 해진 튜닉을 가리켰습니다. “이것은 쿰란에서 남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나할 헤버(Nahal Hever), ‘편지들의 동굴(Cave of Letters)’의 바구니 속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 튜닉에는 두세 살배기 아이의 해골이 감싸져 있었습니다. 로마군이 동굴 위에 진을 쳤고, 유대인 가족은 더 이상 안전하게 동굴을 나갈 수 없어 그 안에서 굶어 죽은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사해 사본의 가장 특별한 점은 아마도 그 방대한 다양성일 것입니다. 서로 다른 종교 계율, 정결 규정, 심지어 성경 책의 서로 다른 판본들까지 발견되었습니다. 사본 연구 초창기에는 이것들이 쿰란 요새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금욕주의 유대 분파, 에세네파(Essenes)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포포비치에 따르면, 텍스트의 방대함과 다양성은 오히려 이 두루마리들이 유대교 내의 서로 다른, 어떤 의미로는 상호 연관된 여러 운동에서 나온 것임을 시사합니다. 적어도 사해 사본 연구가 분명히 보여준 사실은, 당시 유대 종교 생활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웠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구약성서로 알려진 권위 있는 히브리 성경조차 완전하고 불변의 전체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런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이후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에스더서를 제외하고, 훗날 ‘성경적’ 지위를 얻게 된 모든 저작들이 쿰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 본문이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예레미야서는 긴 판본과 짧은 판본, 두 가지 버전이 발견되었으며, 두 판본은 구절의 배열 순서마저 다릅니다. 또 ‘성경적’ 텍스트의 일부에는 각종 해설이 덧붙여진 채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해설 역시 당시 유대 학자 공동체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예수라는 이름이 텍스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 신앙과 연관 짓는 몇몇 개념은 이미 사해 사본 속에서 발견됩니다. 그중 하나인 꽤 신비로운 ‘다니엘 외전(Apocryphon of Daniel)’, 즉 메시아 강림의 환상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 텍스트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영원한 왕권’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다니엘 외전’은 최종적으로 유대 성경에 편입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가 오직 예수, 곧 기독교와만 연결 지었던 용어들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그 뿌리는 기독 이전의 그 격동의 시대, 억압과 커다란 종교적 부흥이 공존하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합니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유대 필사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그들의 깨달음을 사해 사본의 가르침으로 기록해 내던 바로 그 시절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