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수천 명의 아이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이라면 1973년 출간된 인기 청소년 소설 『청바지 십자군(Crusade in Jeans)』 덕분에 이 이야기를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 십자군'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은 미신이다. 다만 13세기에 탄생한 신화일 뿐이다.
테아 베크만(Thea Beckman)의 청소년 소설 『청바지 십자군』은 50만 부가 판매되었고, 네덜란드와 유럽의 아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오늘날에도 77판째로 독자를 만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베크만은 20세기 소년 돌프(Dolf)를 시간 기계를 타고 1212년 슈피어(Speyer)로 내던진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어린이 십자군 부대 한가운데 떨어진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굳게 믿으며 고난을 견디지만, 결국 속아 노예선에 실릴 위기에 처한다. 돌프는 그 계획을 좌절시키고, 이후 어린이 군대는 흩어지고 돌프는 자신의 시대로 돌아간다.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니다. 시간 기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이 십자군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베크만의 소설은 이 전설을 다룬 수많은 책, 시, 연극, 음악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이들은 스스로 현실을 왜곡했던 수십 편의 중세 연대기가 남긴 문학적 메아리들이다.
쾰른에서 브린디시까지
'어린이' 십자군은 아니었지만, 1212년에 실제로 십자군 운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러 연대기 작가들은 이를 그 해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기록했다. 몇 년 전 중세사 학자 피터 라츠(Peter Raedts)가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했으며, 그의 자료 분석과 사건 재구성은 대체로 이론(異論)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체 여정을 끝까지 목격한 증인은 없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은 확실하다. 1212년 봄, 쾰른 주변의 무리들이 갑자기 밭과 가축을 버리고 라인강을 따라 남쪽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자발적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들은 "왕과 제후들이 이전 십자군에서 실패했으니, 이제 우리 같은 가난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무덤을 해방하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바다를 갈라 추종자들과 함께 성지로 건너겠다는 환시를 받았다는 '종복' 니콜라스(Nicholas)가 선두에 섰다. 길 위에서 수천 명의 순례자들은 신성한 감화를 받았다고 확신한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얻었다. 그러나 연대기에 따르면 교회는 이를 의심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미 도중에 쓰러졌다. 생존자들은 브레너 고개(Brenner Pass)를 넘어 제노바(Genoa)에 도착했다. 한 목격자는 행렬을 "약 7,000명; 남자, 여자, 하인과 여종"이라고 묘사했다. 이 목격자는 바다를 건너겠다는 니콜라스의 예언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핵심 집단은 다음 날 떠났지만, 많은 이들이 제노바에 남았다.
다른 연대기 작가들은 순례자들이 이후 마르세유, 로마, 브린디시(Brindisi)에도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곳에서 배에 오르려 했으나, 현지 주교는 그들이 몰래 무슬림에게 팔렸을까 두려워 이를 금지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그럼에도 배에 오른 일부는 해적의 습격을 받아 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
한편 초여름에는 프랑스에서도 무리가 모였는데, 이들을 불러모은 이는 샤르트르 인근 클루아 출신 목자 에티엔(Étienne)이었다. 그는 가난한 순례자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빵을 구하는 환시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도 수천 명의 종교적 열광이 일었다. 그러나 이 집단이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떠났다는 증거는 없다. 프랑스의 운동은 빠르게 진정되었고, 독일의 운동보다 훨씬 적은 파장과 후폭풍을 남겼다.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결정적인 단서는, 가장 오래되고 신뢰할 만한 자료들이 순례자들을 지칭할 때 주로 라틴어 '푸에리(pueri)'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한두 세대 뒤에 옛 이야기를 다시 쓴 연대기 작가들은 이 단어를 고전적 의미인 "아이들"로 해석했다. 바로 이것이 어린이 십자군 전설의 탄생 배경이다. 그러나 '푸에리'는 원래 연령이 아니라 사회적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12세기 사람들은 농업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거지, 목자 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인구 집단, 일종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칭할 때 '푸에리'라는 말을 썼다.
1200년경까지 이 집단은 경제적·인구학적 변화로 크게 성장했다. 950년경 이후의 인구 증가와 상업 및 화폐 경제의 부흥은 농촌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영세 농민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땅을 팔아야 했다. 그들은 더 부유한 농민 밑에서 농장 노동자, 목자, 잡역부로 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것은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는, 뿌리 뽑힌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계층이었다.
주목할 점은, 이 변화가 북프랑스와 라인란트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자료에 따르면 1212년 십자군 운동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1212년의 순례자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십자군에 나선 것은 그들의 주변적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 이전에도 '민중 십자군'은 있었다. 카리스마 있는 환시가가 이끄는 대중들은 교황의 호소에 따라 기사들을 따라 동방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의 해방이 종막의 시작을 알리고,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고통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믿음 속에서, 그들은 길목에서 '타락한' 성직자와 유대인 같은 악마적 적대자를 살해함으로써 미래를 앞당기려 했다.
1212년의 운동은 이 전통에 속하지만, 이 순례자들이 왜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켰고, 왜 그토록 많은 연대기 작가들이 경향성 있는 기록을 남길 필요를 느꼈는지 설명해 주는 새로운 요소들도 지니고 있다.
첫째, 진정한 의미의 민중 십자군은 한 세기 만에 없었다. 둘째, 1212년의 순례자들은 교황의 호소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교회의 관행은 더 이상 그들에게 구원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종말론적 환상에 훨씬 덜 집착했다. 이 십자군과 관련해서는 살해 사건이 보고되지 않는다.
차선책이 아니라
이 순례자들은 종말이 아니라, 십자군 실패의 연속에 대한 종말을 원했다. 목격자들의 기록에서 이 순례자들은 자신감에 차고 신성한 사명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유한 제후와 기사들이 계속해서 예루살렘 해방에 실패했으니, 이제 가난한 그들이 나설 차례였다. 그러나 그것은 차선책으로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들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이 이 사명을 그들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십자군 이념에 대한 이 새로운 해석은 12세기 말부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와, 1100년경 시작되어 1200년경 절정에 달한 이른바 '가난 운동(poverty movement)'의 개혁자들에 의해 설교되었다. 이들은 교회의 부를 쇠퇴의 씨앗으로 보았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단순함과 가난으로의 회귀에서 구원을 찾았다. 교회와 십자군 모두 본질로 돌아가야 했다. 제후의 위엄이 아니라, 무력한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예루살렘을 손에 넣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 이상에 열광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는 그들의 가난에 금빛 광채를 입혀 준 것이니 말이다. 동시에 이것은 왜 그토록 많은 연대기 작가들—대개 번영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이 운동에 대해 덜 긍정적이었는지도 설명해 준다. 1212년 십자군 참가자들을 '미친 아이들'로 묘사하는 한, 그들의 이상 역시 경솔하고 어리석은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