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바이 (Mirabai, 1498~1547년경)
중세 박티 운동의 대표적인 여성 성자 미라바이는 라자스탄 메르타의 라토르 가문 라오 두다의 손자 라탄 싱의 딸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갈리는데, 아차리야 람찬드라 슈클라에 따르면 1516년(비크람 삼바트 1573), 가우리샨카르 히라찬드 오자, 하르빌라스 샤르다, 고피나트 샤르마 등은 1498년(비크람 삼바트 1555)으로 본다.
미라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메와르의 마하라나 상가의 장남 보즈라즈와 혼인했다. 결혼 7년 만에 남편이 전사했고, 얼마 뒤 시아버지 마하라나 상가와 친정아버지 라탄 싱도 칸와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조드푸르의 말데브 왕이 미라의 숙부 비람데브로부터 메르타 왕국을 빼앗으면서 미라는 세속적 기반을 모두 잃게 되었다.
크리슈나를 향한 절대적 헌신
어릴 적부터 종교적 성향이 깊었던 미라는 크리슈나를 자신의 남편으로 여겼다. 세속적 쾌락에서 초연해진 그는 성자들과 함께 예배와 키르탄(찬가)에 몰두했다. 마하라나 상가 사후 그의 아들 라탄 싱과 비크라마디티야가 차례로 메와르의 군주가 되었으나, 둘 다 미라가 사두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제지하려 했으나 미라는 치토르를 떠나 브린다반으로, 다시 드와르카로 가서 생을 마감했다.
미라는 왕가의 영화를 버리고 초연함을 실천했으며, 차마르(구두 수선공) 계급 출신의 성자 라이다스를 스승으로 모셨다. 계급과 위계를 초월한 그는 사군(속성을 가진) 신을 예배했으며, 탁월한 시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민중 사이에서 그의 바잔(찬가)이 널리 불린다. 미라의 영향으로 수많은 여성이 크리슈나 박티의 길을 걷게 되었고, 힌두 가정마다 크리슈나 신앙이 스며들었다. 라자푸타나의 여러 왕도 크리슈나 박티 시와 브라즈 바샤(언어)를 장려했다.
미라의 영적 여정 3단계
- 갈망의 단계: 크리슈나를 그리워하며 "나는 비라하(이별의 고통)에 잠 못 드는데, 세상은 잠든다"(만 비라흐니 사티 자가, 자가 소베 리 알리)라고 노래하고, "다르샨(친견) 없으니 눈이 아프다"(다라스 빈 두칸 라게 나인)라고 탄식한다.
- 성취의 단계: 크리슈나를 얻고 "내가 람 라트나(보배)를 얻었다"(파요지 마인 람 라탄 단 파요)라고 환희한다.
- 합일의 단계(사유자 박티의 절정): 자아를 깨닫고 신과 하나 되어 "내게는 기르다르 고팔(크리슈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마레 토 기르다르 고팔 두조 나 코이)라고 선언한다.
미라의 시는 세속적 속박을 끊고 신에게 완전히 귀의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그는 크리슈나를 불멸의 신으로 여겼으며, 그의 박티는 외식 없이 순수했다.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사원의 문을 모두에게 열었으며, 수많은 파다(시구)를 남겼다. 마하데비 바르마는 미라의 시구를 "세계 박티 문학의 값진 보석"이라 평했다. 저서 <라그 고빈드>를 썼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다두 다얄 (Dadu Dayal, 1544~1603년)
박티 운동의 성자들 중에서도 존경받는 다두 다얄은 아마다바드에서 태어나 라자스탄에서 주로 활동했다. 카비르, 나낙과 마찬가지로 미신, 우상 숭배, 계급 제도, 순례, 단식 등을 반대하며 바르고 진실한 삶을 설파했다. 시재(詩才)가 뛰어났으며, 바잔을 통해 여러 종파 간의 사랑과 형제애를 강조했다. 그의 가르침은 '다두 판트'로 이어졌고, 사후 제자 가리브다스와 마도다스가 전파에 힘썼다.
고스와미 툴시다시 (Goswami Tulsidas, 1532~1623년)
나라하리 아난드의 제자이자 라만다 계열의 저명한 성자인 툴시다는 악바르 황제와 동시대 인물이다. <라ム차리트 마나스>, <기타발리>, <카비타발리>, <비나이 파트리카>, <하누만 바후크>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라마 신앙의 재정립과 사회적 메시지
툴시다는 백성에게 '땅과 브라만, 소와 신을 보호하려고 인간 몸을 입고 오신 다샤라타 난단 슈리 람'(고 드위즈 데누 데브 히트카리, 크리파신두 마누쉬 타누다리)을 예배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세상을 기쁘게 하고 악인을 멸하며 베다 법을 수호하는 분'(자나 란잔 브한잔 칼 브라타, 베드 다르마 라차크 수누 브라타)으로서의 라마상을 제시했다.
일반 민중에게 "신은 나의 주인, 스승, 아버지, 어머니이니 당신의 연꽃 발 밖엔 갈 곳 없다"(모레 유 로드 구루 피투 마타, 카한 자우 자한 모라 포스트 자레)는 절대 귀의를 가르쳤으며, 경전 독서를 권장하고 여러 구루들이 퍼뜨린 교리를 비판해 힌두교의 통일성을 지키려 했다. 사이비 구루를 향해서는 "제자의 슬픔을 덜어주지 못하고 재물만 취하는 구루는 지옥에 떨어진다"(하리 시샤 단 속 나 하리, 소 구르 고르 헬 마후 파라이)고 경고했고, 왕에게는 "백성이 고통받는 나라의 왕은 지옥의 자격이 있다"(자수 라즈 디아 레 두카리, 소 나리푸 아바시 나라크 아디카리)고 일갈했다. <카우 나루 호후 우스 카 로스>를 통해 노예 근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종파 통합의 결정체: 라마차리트 마나스
델리 술탄국(13~16세기)과 무굴 제국(16~18세기) 시기, 힌두교 내 시바파, 샤크타파, 바이슈나바파 간 그리고 사군파와 니르군파 사이에 깊은 반목이 있었다. 툴시다는 <라ム차리트 마나스>로 이 갈등을 해소하려 했다.
- 시바파의 시바와 바이슈나바파의 비슈누 화신 라마를 '서로의 주인이자 친구이자 종'으로 선언했다. "종, 주인, 친구, 시야(시타)의 연인, 모든 면에서 툴시의 이익이 되다"(세바크 스와미 사카 시야-피야 케, 히트 니루드히 사브 비드히 툴시 케).
- 라마의 입을 빌려 "시바 예배 없이는 내 박티를 얻을 수 없다"(아우르 에크 구프트 마트 사비 카한 카르 조리, 산카르 바잔 비나 나라 바가티 나 파바이 모르)고 하여 라마 박타에게 시바 숭배의 길을 열었다.
- 시타의 입을 빌려 시바의 아내 가우리(파르바티)를 찬양함으로써 샤크타파와 바이슈나바파를 화해시켰다. "산의 왕 키소리(파르바티)여 승리하소서. 마헤시(시바)의 얼굴 같은 찬드라(달)여 승리하소서"(자이 자이 기리바르 라즈 키소리. 자이 마헤시 무크 찬드 차코리).
- "사군이건 니르군이건 어느 쪽이든 집착하지 말라, 현인과 푸라나와 베다가 이를 증언한다"(사구나히 아구나히 나히 쿠투 피에르다, 빌리지 세이지 푸란 부드 베다)고 하여 사군-니르군 논쟁을 초월했다.
- 박티 마르그(헌신의 길)와 갸나 마르그(지혜의 길)의 거리를 좁히며 "박티와 갸나엔 차이가 없으며, 둘 다 세속의 슬픔을 없앤다"(바가티 갸나 나히 쿠추 베다, 우바이 하림 바브 삼바브 케다)고 설파했다.
툴시다는 브라만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슈바리(샤바르 계급 여성)의 집에서 베리를 먹이고, 그리드라 계급의 자타유를 구원하며, 니샤드라자를 친구로 삼고, 케바트와 아할랴를 구원하는 라마를 그렸다. 타다카 살해, 수르파나카 코 베기, 시마카 처단 등을 통해 "덕을 갖춘 여성은 예배받을 만하고, 악한 여성은 악한 남성처럼 살육당할 자격이 있다"는 명확한 윤리관을 제시했다.
툴시다스의 종파 화합 노력은 후대 성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시바파·샤크타파·바이슈나바파와 그 내부 이념 간의 간극이 좁혀졌고, 힌두교가 외래 종교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1623년(비크람 삼바트 1680)에 입적했다.
산트 투카람 (Sant Tukaram, 1608~1650년경)
마하라슈트라 데후 마을에서 태어난 투카람은 당대 최고의 성자이자 시인으로, 인도 박티 운동의 주춧돌이었다. '투코바'로도 불리며, 출생 등 세부 사항에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다. 수도승 차이타냐로부터 꿈속에서 '라마 크리슈나 하리' 만트라를 전수받고 17년간 민중에게 설법했다.
말년에 부른 약 4,000수의 <아방(abhang, 운문 찬가)>이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투카람은 즈나네슈와르와 남데브의 경전을 깊이 연구했으며, 이 세 성자 시인의 문학엔 동일한 영적 맥이 흐른다. 직설적인 성품 탓에 언사가 날카로웠으나, 그 이면엔 사회에서 악을 제거해 종교를 수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진리만을 좇아 누구의 비위도 맞추지 않으며 위선을 배격했고, 무경험한 박학자, 장난꾸러기 종교 지도자 등 사회적 폐습을 신랄히 비판했다. 가르침의 핵심은 "일시적 세속의 행복 대신 영원한 파라마르타(최고 진리)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기타 박티 종파
이 계보에서 비슈누 고스와미의 루드라 종파, 히타리반슈의 라다발라비 종파, 하리다시 종파 등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박티 운동의 영향
박티 운동은 인도인의 종교·사회·정치적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여파는 일반 민중이 무슬림 침략자에 맞서 종교의 방패가 되게 했고, 힌두 왕들로 하여금 백성 보호를 신성한 명령으로 여기게 할 정도였다.
주요 영향 10가지
- 힌두 사회에 용기 부여: 무슬림 통치의 억압으로 절망에 빠진 힌두 민중이 <바가바드 기타>의 신 의지(박티)를 통해 무슬림의 가혹 행위를 견딜 힘을 얻었다.
- 무슬림의 가혹 행위 감소: 박티 성자들의 '신일체론'과 '모든 종교는 한 신에 이르는 다른 길'이라는 가르침이 무슬림에게도 스며들어 힌두 탄압이 줄어들었다.
- 종교적 허례허식 축소: 박티 성자들은 종교적 낭비를 강하게 비판하고 검소한 삶과 맑은 행실을 가르쳤다.
- 우상 숭배 부정: 카비르, 남데브, 나낙 등은 니르군(무속성) 신을 숭배하며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 관용과 포용 정신 확산: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관대한 감정이 싹트고 서로에 대한 관용이 생겼다.
- 종교의 근본적 통일성 제시: 박티 성자들과 수피 설교자들이 유일신, 신애, 박티를 강조하며 두 종교의 근본적 일치를 보여주어 상호 이해를 도왔다.
- 민족·개인적 자긍심 고취: 비슈누 화신이 박타를 사랑하고 폭군을 멸한다는 메시지가 민중에게 강하게 전해져 힌두 사이에 종족·개인적 자부심이 생겼다. 약자 보호, 여성·피난처·소 보호를 신의 은총을 얻는 길로 여겼다.
- 지방 언어·힌디어 발전: 성자들이 민중 언어로 설법하면서 지방 언어와 힌디어가 크게 발전하고 다양한 문학이 꽃피었다.
- 달리트 계층에 새 희망: 박티·프라파티(귀의)·샤르나가티(투항)의 길로 누구나 해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상하 계급 간 격차를 줄이고 달리트에게 새 희망을 불어넣었다.
- 민족 정신 각성: 정치적 영향도 컸다. 무굴 시대에 펀자브(구루 고빈드 싱)와 마하라슈트라(시바지)에서 민족 운동이 일어났고, 영국 통치기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