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생존의 수단이 된 섹스: 폐허의 베를린, 무명 여인의 증언

1945년 베를린, 살아남기 위한 선택

1945년 5월, 폐허로 변한 베를린. 한 젊은 독일 여성은 소련군과의 '관계'를 통해 목숨을 부지하려 한다. 그녀는 익명(Anonyma)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일기장에 기록해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여성들이 적진에 몸을 내맡겼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외면되어 온, 거의 금기에 가까운 주제였다. 1959년, 한 독일 여성이 '무명(Anonyma)'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참혹한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출간했다. 베를린 함락 전후 소련 군인들이 베를린 여성들에게 자행한 집단 강간에 관한 고백이었다.

동시에 이 일기는 더 나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소련 군인과 관계를 맺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섹스. 많은 여성이 승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야만 극심한 트라우마를 안고 돌아온 패배자, 즉 남편과 다시 이불을 같이 덮는 일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받아들여 재회한 부부들조차 대개 편의에 기반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전쟁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묻지 않았다.

이 모순적인 주제는 일기 출간 후 작가가 받은 거센 비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민족에게 자신의 결핍과 어두운 이면을 직시하게 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소란 속에 자신이 공격당한다고 느낀 작가는 생전에 일기의 재출판을 금지해 버렸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2003년, 무명 여인의 일기는 다시 서점 진열대에 올랐다. 시간은 제 역할을 했다. 독일 사회는 이미 과거사를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었다. 일기는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무명의 여인에게 마침내 얼굴이 생겼다. 바로 마르타 힐러스(Marta Hillers), 전쟁 중 열렬한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지지자였던 저널리스트이자 사진작가였다.

영화 '무명: 베를린의 여인'

2008년, 독일 영화감독 막스 퍼버뵈크(Max Färberböck)가 이 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바로 <무명: 베를린의 여인>(Anonyma – Eine Frau in Berlin)이다.

"원작에는 감정이나 감상주의가 없습니다. 작가는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강조하기보다 일어나고 있는 일을 통찰하는 데 집중하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비범한 생존 전략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퍼버뵈크는 올해 초 네덜란드 신문 헤트 파롤(Het Parool)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영화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전쟁의 참혹함, 특히 소련 군인들이 저지른 끔찍한 성범죄를 그대로 화면에 담아낸다. 동시에 소련 군인들의 복수심에 대한 이해의 시선도 함께 전달한다. 감독은 주인공의 내면과 생존 전략을 따라가며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관객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혼돈,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져 가던 시대를 선명하게 목격하게 된다.

엇갈린 평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독일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평론('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쳐라!')은 호평을 보냈다. 반면 데어 슈피겔(Der Spiegel)의 영화평('강간 드라마 "무명": 불타는 폐허 속의 눈물')은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며,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의 평론('선정주의와 강간')과 영상 비평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퍼버뵈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 영화로는 절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더욱 그렇죠. 독일에서는 모든 역사 영화가 짓밟힙니다. 많은 독일 비평가들은 역사 영화를 싫어합니다. 아예 만들어지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