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축구의 축제이자 '피의 땅'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2)를 위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네덜란드 대표팀은 첫 조별리그 경기를 하르키우에서 치르고, 훈련 캠프는 크라쿠프에 마련했습니다. 오랜 라이벌 독일과 포르투갈은 리비우에서 격돌합니다. 그런데 이 개최 도시들 상당수는 서방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치와 공산주의가 잔혹하게 저질렀던 참혹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으로 며칠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하르키우의 거리와 광장은 주황색으로 물들 것입니다. 네덜란드 팬들의 축제와 술자리,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겠죠. 물론입니다. 3주간의 환희가 펼쳐질 테니까요.
하르키우 교외의 청동상이 전하는 비극
하지만 눈을 크게 뜬 주황빛 팬들이라면 도시 바깥에 서 있는 청동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조각상은 한 우크라이나 가족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습니다. 남편은 북쪽, 즉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방향을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고 무언가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려 합니다. 아내는 절박하게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아이들은 야위었고, 두려움에 눈을 부릅떴습니다. 도시 안의 신나는 주황빛 광란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풍경입니다.
2008년에 세워진 이 동상은 우크라이나 최대의 국난 중 하나인 홀로도모르(Holodomor), 즉 '굶주림에 의한 살해'를 기리고 있습니다. 1932~33년 소련의 독재자 요세프 스탈린은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에 인위적인 기근을 조장했습니다. 비옥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농업 집단화 계획에 저항하던 자유로운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려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 약 4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하르키우 일대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유로 대회 기간 이곳에서 거대한 주황빛 축제가 벌어지는 지금, 1933년에는 시신을 실은 수레가 오가곤 했습니다.
소련과 나치, 번갈아 닥친 테러
공동 개최국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는 소련과 나치의 테러를 번갈아 겪었습니다.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는 2011년 저서 『블러드랜드(Bloodlands)』에서 이 지역을 '피의 땅'이라 불렀습니다. 홀로도모르는 20세기 내내 이어질 우크라이나 테러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936~38년 스탈린은 다시 몽둥이를 들었습니다. 대규모 공개 재판 과정에서 편집증적 독재자는 정책 반대파 수천 명을 자의적으로 처형했습니다. 특히 하르키우와 수도 키예프—네덜란드가 7월 1일 결승 진출을 희망하는 곳—에서는 소련 정권 반대자들이 대량으로 처형되었습니다.
1941년, 나치 군대가 소련을 침공하면서 학살은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자를 혐오했고, 동방에서 게르만 민족을 위한 '생존 공간(Lebensraum)'을 확보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겼습니다. 독일의 소련 침공 초기, 국방군은 붉은 군대를 빠르게 후퇴시켰습니다. 전선 뒤편에서는 악명 높은 특별작전집단(아인자츠그루펜)이 진격했습니다. 이들의 구체적 임무는 정복 지역을 독일의 식민지화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현실적으로는 유대인·슬라브족·롬족 등 열등한 '운터멘셴(Untermenschen, 하등인종)'을 모두 제거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약 3만 명의 유대인들은 키예프 교외의 협곡(바비야르)에 말 그대로 쌓여 올라간 뒤 한 명씩 총살당했습니다. 스탈린에게 그랬듯 나치에게도 기근은 원치 않는 사람들을 없애는 검증된 수단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초원의 일부 마을들은 그저 울타리로 둘러싸였고, 사람들은 주민들이 굶주림과 탈진으로 모두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리비우 게토
조별리그에서 라이벌 포르투갈과 독일이 격돌하는 도시 리비우와 주변 지역은 1941년 7월 총독부(Generalgouvernement)에 편입되었습니다. 이곳은 형식상 제3제국의 일부였지만 무엇보다 나치의 가장 비인간적인 범죄 실험장이었습니다. 절멸수용소 소비보르, 베우제츠, 트레블링카, 마이다네크가 이 지역에 자리했습니다. 유로 대회 기간 주황빛 팬들의 본거지가 될 폴란드 크라쿠프는 가장 유명한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약 50km 떨어져 있으며, 이곳에서는 약 110만 명, 주로 서유럽 출신 유대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전쟁 직전만 해도 리비우에는 이미 12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치가 도시를 점령하자 여러 동네를 울타리와 철조망으로 외부 세계와 차단했습니다. 주변 지역에서 추방된 유대인 10만 명이 추가로 이 게토로 이송되면서 금세 만원이 되었습니다. 나치는 최소한의 식량 배급만을 제공했고, 굶주림과 질병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노인과 환자가 게토에서 끌려나가 들판에서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1942년, 끔찍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 구체화되면서 리비우 게토는 강제로 비워졌습니다. 주민 대부분은 가축 운송차에 실려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준결승전이 열리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바르샤바 게토도 비슷한 역사를 지닙니다.
전쟁이 끝나도 이어진 고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고난을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곧 소련 공화국 중 하나로 복원되었고 스탈린이 다시 실권을 쥐었습니다. 1944~46년 약 15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나치 수용소와 대체로 비슷한 조건의 굴라크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소련 전역에서 유대인과 소수민족에 대한 추방은 20세기 내내 일상이었습니다. 폴란드는 소련의 공산 위성국이 되었고, 폴란드의 반체제 인사들 역시 굴라크로 끌려갔습니다. 러시아 비밀경찰은 모든 사람을 감시했습니다. 두 나라는 비효율적인 공산 경제 때문에 1990년대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피어린 근현대사의 흔적은 어디에서나,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폴란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르키우의 홀로도모르 기념비 같은 추모물뿐 아니라, 부패,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 여전히 만연한 빈곤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유로 대회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20세기가 남긴 상처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의 고고학
-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암 발병 위험이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