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토록 거대한 목욕탕에 들어가 본 적이 없소."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는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촐스키 헤트만과의 전투 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폴란드 지휘관은 스웨덴인들에게 진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스웨덴 군주 본인도 그와의 충돌에서 두 번이나 부상을 입었다!
1626년 스웨덴이 왕령 프로이센을 점령하고, 그니에프 전투에서 무적으로 통하던 후사르 기병마저 적 보병의 화망 앞에 무너지자, 지그문트 3세는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던 상비군과 야전 헤트만을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코니에촐스키는 기병 4,200명, 용기병 1,000명, 보병 약 1,000명을 이끌고 프로이센 전역으로 향했다. 새로운 적, 즉 구스타프 아돌프가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맞서기 위해서였다.
적 연대의 화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침략자들이 주둔하는 취약한 거점을 향해 빠르고 은밀한 기습을 감행하는 전술을 택했다. 아울러 적의 보급선과 통신망을 차단했다. 이러한 작전을 통해 그는 스웨덴 사령부로 하여금 방어적인 형태의 작전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력과 토룬 세임에서 통과된 전쟁 특별세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주도권은 여전히 적의 손에 있었다. 스웨덴은 1626년 12월 리보니아의 콕네세에서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며 이를 입증했다. 이듬해 봄에는 이미 코니에촐스키의 군대를 분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양측에서 동시에 공격해 그의 군대를 집게처럼 포위한다는 구상이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코니에촐스키와의 전투 과정에서 두 번이나 죽음에 가까운 위기를 맞았다.
국왕의 측근인 악셀 옥센스티에르나는 비스와 강 방면에서 진격하고, 요한 슈트라이프 폰 라벤슈타인과 막시밀리안 토이플이 지휘하는 신규 징집 부대는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에서 이동해 오고 있었다.
화려한 승리
그러나 운명은 헤트만에게 호의적이었다. 비스와 강의 홍수로 옥센스티에르나의 부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폴란드 지휘관은 두 대령의 부대로 시선을 돌렸다. 교전은 4월 12일 체르네(함머슈타인) 인근에서 벌어졌다.
적은 마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나흘 뒤 끊임없는 포화에 시달린 병사들은 지휘관들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항복 문서는 4월 18일에 서명되었다. 패배한 측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투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게다가 무려 500명에 가까운 라이터 기병이 폴란드 군에 복무하기로 했다! 코니에촐스키는 일부 보병을 자신의 부대에 편입하고 그들의 장비까지 보충했다.
같은 해인 1627년, 야전 헤트만은 '북방의 사자'라고 불리는 구스타프 아돌프와도 정면으로 조우했다. 스웨덴 군주는 8,000명 규모의 군단을 이끌고 피와바에 상륙했다. 교전은 그의 부대가 키에즈마르크 인근에서 비스와 강을 도하하던 중 벌어졌다. 국왕 본인은 엉덩이에 부상을 입고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가 코니에촐스키에게 당한 첫 번째 패배였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7월에 스웨덴군이 오르네타를 포위 공격하자, 헤트만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니에프를 공격해 짧은 포위전 끝에 요새를 탈환했다. 이 무렵 국왕은 그에게 그단스크 방어 임무를 맡겼고, 그는 트체프 인근에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1627년 8월 7~8일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폴란드군 7,800명이 후사르와 카작 기병 2,500명을 포함한 10,000명의 스웨덴군과 맞섰다. 두 군대 사이에는 두 개의 제방이 가로지르는 모트와바 늪지가 놓여 있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계획은 폴란드군을 제방 건너로 유인한 뒤 전력을 집중해 타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니에촐스키는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스웨덴 라이터 기병의 공격을 격퇴한 뒤, 적 참호선에 대한 공격을 멈추면서 국왕으로 하여금 계획을 수정하게 만든 것이다. 이에 국왕은 폰 투른 백작 휘하의 모든 라이터 기병을 폴란드 기병에게 던져 넣었지만, 제방 앞 방어진지에 집결한 폴란드 보병이 이 공격을 저지해냈다.
연방 기병은 큰 손실을 입었다. 헤트만의 말이 전사했지만 그는 말에서 내려 계속 싸웠다. 적의 밀집 화망 속에서도 군대가 진지를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용감한 태도 덕분이었다. 결국 전황은 우연히 뒤집혔다. 전투 중 구스타프 아돌프가 총탄에 맞은 것이다. 총알은 목과 쇄골에 명중했고, 국왕은 모든 추가 작전의 중단을 명령했다.
트치아나 전투
폴란드-스웨덴 전쟁의 다음 해, 헤트만은 보병과 야포 화력의 지원을 받는 신속한 기병 기동 공격 전략을 계속 추구했다. 그는 야전 방어공사와 각종 지형 장애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이름을 유럽에 널리 알린 것은 1629년 6월 26일 트치아나에서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와 벌인 충돌이었다. 스웨덴군은 그루지옹츠에서 후퇴하던 중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슈툼을 거쳐 말보르크로 향하고 있었는데, 선두에는 세 개의 라이터 기병대가 호위하는 보병이 이동하고 있었다.
헤트만은 이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제국 증원군으로 강화된 적 후위 기병을 향해 자신의 기병을 돌진시킨 것이다. 얀 라인 백작이 지휘하는 스웨덴 후위 부대는 폴란드 후사르에게 순식간에 분쇄되었다. 풀코비체 방면으로 이동하던 두 번째 적 기병대에 대한 추격전이 한창이던 때, 구스타프 아돌프 본인이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전투에 합류했다.
그는 라이터 기병들에게 필사적으로 싸울 것을 독려했지만, 그들 역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침략자들의 상황은 헤르만 브랑겔 야전 원수가 마지막 기병 예비대를 투입해서야 겨우 구원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스웨덴 군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큰 목욕탕에 들어가 본 적이 없소."
코니에촐스키와 스웨덴군이 연달아 벌인 세 번의 교전에서 라인 백작과 브랑겔의 아들 얀 빌헬름 라인그라프를 포함해 약 1,200명의 스웨덴군이 전사했다. 북방 출신 병사 다수가 포로로 잡혔다. 반면 폴란드군의 손실은 전사 약 200명, 부상 같은 수로 추산되었다. 이 전투의 성과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지만, 최고사령관에게 값진 명성과 인정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코니에촐스키는 1629년 9월 26일 스타리 타르크에서 체결된 스웨덴과의 휴전 조약의 굴욕적인 조건에는 개입할 수 없었다. 이 조약에 따라 발트 너머의 이웃들은 폴란드 무역에 대한 관세 징수권을 확보했고, 왕령 프로이센의 여러 도시를 계속 점령했다. 한편 헤트만은 또 다른 코사크 반란, 이번에는 타라스 페도로비치가 이끄는 봉기에 맞서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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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들의 승리 비결은 『폴란드의 전쟁 신들(Polish Gods of War)』이라는 책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위 글은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촐스키를 다룬 장에서 발췌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