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년, 조국을 떠난 애국자들
1787년 오라녜(Orange) 정권이 복원되면서 네덜란드의 애국자들은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망명 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남겨진 편지들에 따르면,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그들은 옛 정치적·시민적 이상에 더욱 집착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공화국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애국자 봉기는 진압되었습니다. 총독(스타트홀더) 빌럼 5세는 프로이센 군대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되찾았고, 구체제의 많은 정치적 반대자들은 해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부는 독일 제후국, 남부 네덜란드, 심지어 미국으로 떠났지만, 가장 많은 이들이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정치적 난민으로 공식 인정하고 재정 지원까지 제공했습니다.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프랑스 북부에 머물렀는데, 언론인·출판인·장인 등 수백 명이 됭케르크(Dunkerque)와 그라블린(Gravelines)에 정착했으며, 생토메르(Saint-Omer)의 난민 공동체에는 약 천 명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편지가 전해 주는 망명의 기억
그들은 이 망명 생활을 어떻게 경험했을까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자서전적 글들이 있지만, 대부분 사후에 집필되었고 주로 남성이 썼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행히 여러 서신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중에는 정치 난민들의 아내들이 보낸 편지가 많습니다. 후방 가정에서 전해진 이 메시지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도피가 가족과 가정생활에 남긴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편지 교환은 남겨진 친구와 친척과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펜은 집필자들을 잠시나마 향수병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애국계 신문 '홀란츠 헤스토리셰 쿠란트(Hollandsche Historische Courant)'의 발행인이자 주필인 남편을 둔 에밀리 파인예루작(Emilie Fijnje-Luzac)은 델프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안트베르펀과 브뤼셀로 이어지는 자신의 도피 과정을 가족에게 상세히 알리며 상실감과 싸웠습니다.
그녀는 탁한 선창 안에서 임신한 배를 부풀린 채 두 아이를 짐 사이에 끼워 넣고 로테르담에서 안트베르펀으로 항해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생토메르 근처 와텐 성에서 델프트에 남긴 집과 가구를 팔아야 하는 일을 마음 아파하며 처리하고, 떠나야 했던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렸다고 적습니다.
홀로 남겨진 이들
네덜란드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 머문 애국자들의 편지와 미국을 피난처로 택한 이들의 편지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에게 작별은 더욱 최종적이고 감정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적어도 일부에게는 모국과 단절된 지금, 동화되기보다 자신들의 기준을 높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신조였습니다.
당시 미국으로 간 이들은 돌아올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4주, 바람이 나쁘면 2개월까지 걸리는 대서양 횡단은 가족 방문을 위해서도 너무 무겁고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결국 가족과 친구의 관계망은 종이 위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 속 현실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가족들은 글로만 '마음속으로 서로를 껴안았습니다'. 절임 달걀이 든 통, 신문, 옷감 등이 담긴 소포를 보내며 그들은 남겨진 이들과의 관계를 놓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영원한 이별의 아픔
영원한 작별에 대한 슬픔은 당연히 남겨진 친척들에게도 컸습니다. 1789년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군인이자 애국 지도자 아담 게라르트 마파(Adam Gerard Mappa)의 아내 안티에 마파(Antje Mappa, 역시 델프트 출신)의 여동생은 외동딸인 언니와 영원히 헤어지게 된 깊은 고통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잃었어요. 이제 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말해야겠어요. 나는 이제 이 세상의 낯선 사람이 된 것 같다니까요.'
잦은 편지 분실로 이어진 불안정한 연락은 이 슬픔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델프트의 가족들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친척들이 무사히 뉴욕에 도착했고, 심지어 미국 정치인 존 애덤스(John Adams)의 집에 임시로 머물렀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애덤스는 애국자 시대 델프트에 특사로 머물며 미국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인물입니다. '날개가 있다면,' 또 다른 가족이 절박하게 적었습니다, '나는 이미 저곳으로 날아갔을 텐데.'
한편 마파 부부는 진짜 문화 충격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신대륙은 그들이 감히 꿈꿔본 적 없는, 한편으로는 황량하고 동시에 훨씬 다채로운 현실을 펼쳤습니다. 탐험할 세계가 열려 있었지만, 안티에를 전율하게 만든 인디언들이 돌아다니는 땅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부족의 연합체인 이로쿼이(Iroquois)족은 그녀의 눈에 무서운 '검은 야만인', 곧 '알록달록한 깃털을 두르고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코와 귀에 고리를 꿴 전사들'로 보였습니다. 미국에서는 개척을 기다리는 원시적 황야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이 모험적인 환경 속에서도 네덜란드 애국자들은 자신의 국적과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마파 부부는 정치적 영웅 요한 판 올덴바르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의 이름을 딴 바르네벨트(Barneveld, 현재 트렌턴)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거의 개발되지 않은 뉴욕주 오니다 카운티 깊숙한 황야에서 그들은 농부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도시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교양 있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시민의 예법을 고수했습니다. 안티에가 썼듯이, '우리는 숲속에 살지만 나라에서 가장 품위 있는 사람들과 늘 어울립니다. 과시하지 않더라도 예의를 지키는 것이 언제나 좋으니까요.'
프리슬란트 모자를 벗다
프랑스의 많은 난민들에게 상황은 달랐습니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것이 임시적인 작별임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해방된 공화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정치 난민 신분을 오히려 자신의 지위를 높여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마파 부부처럼 옛것에 매달리는 대신, 그들이 동경하던 프랑스 문화에 스스로를 동화시켰습니다. 영감을 준 것은 정치였습니다. 1789년 '자유, 평등, 박애'를 구호로 하는 위대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프랑스 특유의 삶의 기교(savoir vivre) 역시 그러했습니다.
애국자 코르트 람베르투스 판 베이마(Coert Lambertus van Beyma)의 아내로 평범한 출신에 프랑스어를 못 하는 프리슬란트 출신의 아우키에 포우츠마(Aukje Poutsma)조차 프랑스 풍습에 거침없이 녹아들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언어와 필사적으로 씨름한다고 말했고, 프리슬란트 모자를 벗어던졌으며, 남편이 질투하지 않는다면 '무도회와 파티'에 마음껏 참여하겠노라고 했습니다. 프리슬란트로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그녀는 승리자처럼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유행이 없거든요.'
난민들은 프랑스인들에게 성공적으로 로비를 펼쳐 공화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었고, 1795년 대부분 네덜란드로 돌아왔습니다. 바타비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인 1796년 설립된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에는 판 베이마를 비롯한 많은 전직 망명자들이 자리했습니다. 그는 생토메르에서 다른 난민들과 정치 토론을 수없이 연습한 끝에 새 네덜란드 의회에서 가장 활발하고 재능 있는 연설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곳은 '혁명의 고등학교'였습니다. 수많은 격론 가운데 그가 '7년의 망명 생활'을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축복받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회고했다고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