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브렉시트가 될까, 안 될까? 1975년에도 국민투표로 영국의 유럽 잔류가 결정됐었다

2015년 5월 7일 영국 총선 운동에서 유럽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캐머런 총리는 영국의 EU 잔류 조건 재협상을 약속했고, 그 결과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밝혔다. 사실 이와 같은 국민투표에는 전례가 있다. 1975년 6월 5일, 영국 국민들은 유럽경제공동체(EEC) 잔류 여부를 직접 투표로 결정한 바 있다.

EEC 가입까지의 긴 여정

유럽 문제를 둘러싼 국민투표는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한 지 불과 2년 반 만에 치러졌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가입에 대한 의구심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영국은 1957년 EEC를 설립한 로마조약 협상에서 일찌감치 빠져 있었는데, 당시 자국 연방(코먼웰스)과의 경제 관계가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입장을 바꾼 영국은 가입을 추진했지만,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EEC의 대서양(미국) 쪽 기울기를 우려해 두 차례나 가입을 막았다. 1969년 드골이 물러난 후, 보수당 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세 번째 시도에 나섰다. 그는 EEC 가입과 이를 통한 유럽자유무역지역 접근이 침체된 영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 기대했다.

협상은 1970년 시작되었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영국은 공동농업정책(CAP)의 희생양이 될 것을 우려했다. EEC 내에서 농민들에게 수출 보조금이 지급되었고, 그 재원은 수입 관세로 충당되었다. 영국은 농업 부문이 상대적으로 작고 수입 의존도가 높았으며(특히 코먼웰스 국가들로부터), 따라서 공동농업정책이 영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예상했다. 결국 히스 정부는 이러한 불이익보다 가입의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고, 영국 의회도 같은 결론에 도달해 300시간에 달하는 마라톤 심의 끝에 근소한 다수로 찬성했다. 1973년 1월 1일, 영국은 아일랜드, 덴마크와 함께 EEC에 가입했다.

불균형한 구도

그러나 모든 이가 가입 조건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경제 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야당 노동당은 보수당이 가입 협상 과정에서 영국의 이익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하며, 이를 1974년 총선의 핵심 쟁점으로 삼았다. 해럴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은 재협상과 그 결과에 대한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는 표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EEC 탈퇴까지 주장하던 당내 좌파를 진영 안에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윌슨은 노동당 선거 선언문에 '근본적인 재협상'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한 해에 두 차례 총선이 치러진 격동의 정치 국면을 거친 끝에, 노동당은 1974년 10월 간신히 소수 여당 자리를 확보했다. 새 총리가 된 윌슨은 EEC 회원국들과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회원국들은 기존 조약의 틀 안에서 가능하고 공동농업정책에 큰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선에서만 사소한 수정과 외피에 불과한 변경에 응할 뿐이었다.

재협상은 1975년 3월 마무리되었다. 영국 정부는 코먼웰스 국가들로부터의 유제품과 설탕 수입에 대한 면제 혜택을 확보했고, 더 중요하게는 공동농업정책 내 수입 관세 납부에 관한 '수정 메커니즘' 도입을 이뤄냈다.

윌슨은 변경 사항이 근본적인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여러 분야에서 의미 있고 뜻밖의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국민투표에 승부를 걸었다. 특별한 점은 내각 구성원들에게 스스로의 입장을 정할 자유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노동당 좌파에 속한 장관들은 영국의 EEC 잔류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16명 중 7명에 불과한 소수였다.

국민투표를 앞둔 캠페인은 어쨌든 불균형한 싸움이었다. 찬성 진영에는 윌슨을 비롯해 로이 젱킨스, 데이비드 오언, 빌 로저스, 셜리 윌리엄스 등 노동당 지도부와, 전 총리 히스와 신임 당대표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 거의 전체가 참여했다. 반면 반대 진영은 노동당 좌파, 공산당, 산별 노조 일부, 일부 보수당 우파 원내 의원, 극우 민족전선(National Front), 그리고 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설득력이 떨어지는 진영이었다.

반대 진영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영국 국민뿐 아니라 특히 기성 질서 전반이 반대 진영에 냉담했다. 런던 시티를 필두로 한 기업계와 언론은 찬성 진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 결과 영국의 EEC 잔류 지지 세력은 반대 진영보다 20배 이상 많은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고, 훨씬 효과적인 캠페인을 펼쳤다.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정보?

국민투표 결과는 1975년 6월 6일 발표되었다. 압도적인 3분의 2 다수, 즉 1,700만 명의 영국인이 EEC 잔류에 찬성했고 반대는 800만 명에 그쳤다. 투표율도 유권자의 65%로 매우 높았다. 윌슨 총리는 "어떤 영국 정부도 총선에서 얻어본 적 없는 더 많은 표, 더 큰 다수로 판결이 내려졌다. 영국이든 세계 어디든 그 의미를 의심할 사람은 없다. 이것은 건설적이고 적대감 없이 치러진 자유로운 투표였다. 이로써 14년에 걸친 국가적 논쟁에 종지부가 찍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윌슨 정부가 재협상한 공동농업정책의 보상 메커니즘은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84년에야 대처가 총리로서 퐁텐블로 유럽 정상회의에서 특별 환급을 강제로 받아낼 수 있었다. 대처는 이미 국민투표 당시처럼 친유럽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그렇게 해냈다.

더 긴 호흡으로 보면, 국민투표는 윌슨이 두려워했던 당내 분열을 막지도 못했다. 1981년, 친유럽 우파는 반유럽 좌파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젱킨스, 오언, 로저스, 윌리엄스는 탈당해 사회민주당(SDP)을 창당했고, 이 당은 1988년 자유당과 합쳐 자유민주당이 되었다. 한편 좌파는 노동당의 노선을 바꾸어 놓았다. 대처 집권기 동안 노동당은 국민투표 없는 EEC 탈퇴를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 사이 여론에서는 영국 국민이 국민투표에서 속았거나, 최소한 충분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EEC는 곧 자유무역과 공동시장 이상의 존재임이 드러났다. 찬성 캠페인 측은 유럽연합과 경제통화동맹 같은 미래 계획, 그리고 유럽법이 국내법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빼놓았다. 브뤼셀로의 권한 이양은 부차적인 조항에서만 언급되었다. 반대 캠페인 역시 공동시장이 유럽 초국가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라며 지나치게 과장했다.

돌이켜보면, 국민투표 당시 영국인들은 투표함 앞에서 어떤 정치인을 가장 신뢰하는지에 대해 답했을 가능성이 높다. 젱킨스가 국민투표 결과를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한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영국인들은 늘 따라왔던 사람들의 조언을 따랐다."

더 잘 알고 있는 국민

브뤼셀로부터 여러 분야의 권한을 '되찾으려' 하는, 그럼에도 영국의 EU 잔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게 지금 가장 큰 질문은 미래의 국민투표에서 영국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이다. 윌슨처럼 그 역시 당 안에 두 개의 날개를 안고 있다. 친유럽 성향의 날개와 반유럽 성향의 날개. 캐머런은 권한 재협상이 특히 이민 문제를 둘러싼 유럽 규제에 대한 영국의 불만을 즉각 해소하고, 자신의 보수당 내 불평하는 우파와 나이절 파라지가 이끄는 포퓰리즘 정당 영국독립당(UKIP)의 기세를 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캐머런은 재협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기에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충분할지는 확실치 않다. 다른 EU 회원국들은 당장 재협상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머런은 국민투표 캠페인에서 윌슨보다 훨씬 고된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매우 시끄러운 UKIP, 비판적인 언론 환경, 그리고 더 잘 알고 있는 국민을 상대해야 한다. 캐머런을 위해 바랄 수 있는 것은, 영국인들이 다시 한번 늘 따라왔던 사람들의 조언을 따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