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암스테르담의 오트쿠튀르, 네덜란드 패션의 탄생과 변천사

매년 7월 열리는 암스테르담 패션 위크(Amsterdam Fashion Week)가 시작되면, 네덜란드의 수도는 열흘 동안 새로운 패션 컬렉션의 도시로 거듭납니다. 저명한 네덜란드 디자이너부터 떠오르는 신예까지, 그들의 작품을 입은 모델들이 런웨이를 가로지릅니다. '더치 디자인(Dutch Design)'은 과거에 비해 입지가 다소 흐려지긴 했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882년, 실뱅 칸이 목격한 충격

1882년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오트쿠튀르 하우스 히르슈 & 시(Hirsch & Cie)의 실뱅 칸(Sylvain Kahn)은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 부인들의 차림새는 너무나 촌스럽고 유행에 뒤떨어져 마치 중국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본래 네덜란드에 지점을 낼 계획이 없었던 히르슈 & 시는 그러나 이곳에서 시장의 공백을 발견합니다. 드디어 네덜란드 부인들도 자국에서 오트쿠튀르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임시 건물에서 잠시 영업한 뒤, 메종 히르슈 & 시(Maison Hirsch & Cie)는 1912년 라이데스플레인(Leidseplein)에 새로 문을 연 패션 궁전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새 옷 한 벌, 생각보다 복잡했던 시절

19세기 말 대형 패션 하우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새 드레스나 정장 한 벌을 구하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당시 상점에는 큰 쇼윈도우가 없어 '윈도우 쇼핑'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품들은 진열장과 서랍 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손님이 요청할 때만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새 옷을 만들려면 재료를 하나하나 따로 구입해야 했습니다. 원단은 직물상에게서, 장식품은 장식 공방에서 구한 뒤, 남성이라면 양복점에, 여성이라면 코스튬 재봉사에게 가서 치수를 재야 했습니다. 재단사는 패션 화보를 참고해 전체 의상을 맞춤으로 제작해 주었죠.

이 과정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기에 부유한 시민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중고 의류로 만족하거나 간소한 옷을 직접 지어 입어야 했습니다. 무엇이 유행하는지는 그들과 무관한 일이었고, 오직 엘리트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패션의 성지 파리로 떠나 새 옷장을 채울 여유조차 없었으니까요. 당시 프랑스 궁정이 절대적인 기준이었고, 유럽 전체가 이곳에서 생겨나는 트렌드를 주목했습니다.

오트쿠튀르의 발명

19세기 중반까지 코스튬 재봉사들은 고객의 의뢰에 따라 원하는 옷을 만들어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패션계를 영원히 바꿔놓을 사건이 벌어집니다.

영국인 찰스 프레더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가 스스로 디자인을 구상해 자신만의 컬렉션을 선보인 것입니다. 그는 1857년 세계 최초의 오트쿠튀르 하우스를 열었고, 고객의 주문이 아닌 디자이너의 창작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오트쿠튀르였습니다.

워스는 거울과 샹들리에로 가득한 어두운 살롱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의상은 모두 검은색으로 제작되었는데, 고객이 나중에 원하는 색상을 직접 지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부유한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는 호화로운 이브닝 웨어에 집중했습니다. 프랑스 황후 외제니와 그녀의 궁정 전체가 그를 사랑했죠. 또한 그는 고객들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옷에 추가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디자이너의 이름이 라벨에 새겨져 옷 안에 꿰매진 순간입니다. 이 라벨, 즉 '그리프(griffe)'는 그의 오트쿠튀르의 핵심이 되었고, 1865년경 워스는 유럽 귀족 대부분의 옷을 입혔습니다.

찰스 워스 이후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더 많은 디자이너와 패션 하우스가 생겨났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늘면서 새로운 패션 하우스들은 옷을 미리 준비해 둘 용기를 냈습니다. 하우스가 원단을 공급하고 쿠튀르(couturier)들은 1년에 두 번 컬렉션을 선보였고, 고객은 그중에서 골라 맞춤 제작을 의뢰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선택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셈입니다.

패션 궁전 속의 오트쿠튀르

네덜란드에는 아직 자국 디자이너가 배출될 환경은 갖춰지지 않았지만, 오트쿠튀르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었습니다. 1882년 실뱅 칸이 정확히 짚어낸 바로 그 기회입니다. 처음에 이 패션 하우스는 엘리트를 위한 오트쿠튀르만을 판매했습니다. 그들에게 라이데스플레인의 새 패션 하우스는 명실상부한 궁전이었습니다. 프랑스식을 본떠 금박을 입힌 울타리, 매우 높은 천장, 큰 쇼윈도우를 갖추었고 곳곳에 빛과 화려함이 넘쳐났습니다. 공용 언어마저 프랑스어였기에, 문지방을 밟는 순간 누가 들어올 수 있고 누가 아닌지가 드러났습니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덜 운 좋은 사람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쇼윈도우만 구경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1912년 개관 후 이 매장은 티룸과 패션쇼라는 새로운 선례를 남겼습니다. 네덜란드 부인들이 처음으로 자국에서 패션쇼를 관람한 것이며, 파리와 빈의 작품들이 선보였습니다. 갤러리 전체에 의자가 배치되었고, 그 사이로 모델들이 걸을 수 있도록 회색 양모 카펫이 깔렸습니다. 수백 명의 관객은 익숙하지 않은 걸음걸이로 움직이는 프랑스 모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카펫 위를 떠다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암스테르담, 패션의 도시로

1912년 이후 패션쇼는 점차 보편화되었고,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의 패션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 오트쿠튀르의 재단이 단순해지면서 모방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옷값은 내려갔고, 최신 유행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처음에 엘리트들은 하녀들까지 최신 유행을 좇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수세기 동안 최상위 계급의 특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후 핏과 품질이 개선되면서 '컨펙션(기성복)'은 더 이상 나쁜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메종 드 보네트리(Maison de Bonneterie) 같은 상점들은 오트쿠튀르는 아니지만 고급 기성복을 판매했습니다. 영감의 원천은 여전히 프랑스 수도의 오트쿠튀르였고, 이 점은 확실히 내세워졌습니다.

1933년 이후 독일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많은 패션 스튜디오가 베를린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전했습니다. 그 결과 암스테르담은 여성복의 중심지로 점점 더 부상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섬유가 배급품이 되면서 오트쿠튀르와 의류 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섬유 부족 사태는 종전 후 몇 년간 이어졌지만, 그 이후 패션은 다시 화려하게 돌아왔습니다.

1947년부터 암스테르담에서는 1년에 두 번 암스테르담 패션 위크가 개최되었습니다. 프랑스식이 아닌 영어 이름을 사용한 것은, 전후 미국산 모든 것이 '핫(hot)'했기 때문입니다. 이 행사는 네덜란드 여성복 산업이 주최했으며 해외 바이어들을 겨냥했습니다. 제조업체들은 여전히 파리를 기준으로 삼아, 그곳의 쇼를 참관한 뒤 얻은 영감과 모델을 바탕으로 자체 컬렉션을 제작하곤 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패션쇼는 상당한 이벤트였습니다.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고, 폴리고온(Polygoon) 극장 뉴스에서도 다루어졌습니다. 무대는 암스테르담이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파리에 향해 있던 셈입니다.

암스테르담 패션 위크는 1950년대 후반까지 이런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이후에는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의 차례가 왔습니다. 늘 배후에 머물러 있던 그들이 이제 앞으로 나서 자신들만의 패션쇼를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드가르 보스(Edgar Vos), 프랑크 고버스(Frank Govers), 프란스 몰레나르(Frans Molenaar) 같은 이름들은 오늘날에도 회자됩니다. 이제 시선은 파리가 아닌 미국과 영국으로 향했습니다. 섹스, 드러그, 록앤롤이 판을 치던 청년 문화 속에서 오트쿠튀르는 미니스커트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오랜 공백 끝에 2004년부터 암스테르담 패션 위크는 다시 1년에 두 번 개최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이 초청장을 지닌 관객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예전 패션쇼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