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로 게스트 칼럼이 실리는 Kennislink에서는 매번 새로운 연구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 관점에서 사회와 일상 속 사건에 담긴 과학적 배경을 다룹니다. 이번 주 칼럼니스트는 최근 출범한 웹사이트 '500년의 이주(vijfeeuwenmigratie.nl)'의 프로젝트 책임자 수잔 르클레르크(Susan Leclercq)입니다. 그녀가 네덜란드 역사 속 이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역사 속 이주는 자연스러운 현상
이주는 역사상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일자리와 안전, 그리고 사랑을 찾아 수백 년 동안 세계 곳곳을 떠돌아 왔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네덜란드에 정착한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오늘날 네덜란드인의 무려 98%가 외국계 조상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거의 모든 네덜란드인이 이민자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이주는 여전히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터키인과 모로코인에 대한 언론 보도는 대체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터키·모로코 이민자는 특별한 존재일까?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터키인과 모로코인이 다른 이민자들과 다르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 차이는 '규모'와 '종교'에 있다고 설명됩니다. 즉, 숫자가 많고 종교도 달라서 네덜란드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 정도 규모의 집단은 네덜란드 이주 역사에서 이미 여러 차례 등장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주민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터키인과 모로코인은 임시 체류가 영구 정착으로 이어진 첫 번째 사례라고 하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17세기, 도시의 절반은 이민자
17세기 초만 해도 네덜란드 도시에서 이민자의 존재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인구의 40%가 외국 출생이었으며, 라이던(Leiden)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이민자였습니다. 이들의 상당수는 오늘날 벨기에에 해당하는 남부 네덜란드에서 온 난민들이었습니다.
남부 네덜란드 출신 이주민 대부분은 칼뱅파 신자로, 박해를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스페인 종교재판의 위협에서는 비교적 안전했지만 경제 위기는 피할 수 없었고, 그중 일부 역시 북쪽 네덜란드로 떠났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도시로 이주해 살게 된 사람은 수십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이주민들
이주민들은 네덜란드에서 통용되는 종교와 다른 신앙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18세기 중반에는 독일·폴란드·러시아 출신 아슈케나짐 유대인 1만 명이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후 그 수는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암스테르담에 살았습니다. 이디시어를 사용했고, 눈에 띄는 복장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가난했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사회 최하층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이 사용하던 '하이 독일 회당'은 세파르딤 유대인의 회당 바로 옆에 지어졌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인 이 같은 같은 신앙의 동포들은 이미 17세기에 네덜란드에 도래해 있었으며, 암스테르담의 무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헝가리 어린이 열차: '3개월 휴가'였던 이주
많은 이주민들이 '잠시 네덜란드에 다녀가겠다'는 생각으로 떠났지만, 결국 돌아가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여러 단체가 점령지였던 벨기에와 프랑스의 어린이들을 네덜란드로 데려와 건강을 회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런 자선 활동은 헝가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헝가리 어린이들이 특별 열차를 타고 네덜란드로 넘어와 위탁 가정에서 생활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많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아예 헝가리인 학급 전체가 구성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3개월간의 휴가'라는 명목이었지만, 많은 아이들의 체류 기간은 연장되었고, 결국 약 3분의 1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
이처럼 방대한 숫자, 다른 종교, 그리고 길어진 체류는 터키인과 모로코인 이민자를 특별히 유례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습니다. 네덜란드 역사 전반을 놓고 보면, 오늘날의 이주는 과거 수백 년간 반복되어 온 흐름의 연장선에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