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스워도프스카퀴리(Maria Skłodowska-Curie)는 남편 피에르와 함께 방사능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최초로 수행한 과학자다. 그녀는 이 현상을 바탕으로 두 개의 새로운 화학 원소를 발견했으며, 과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네덜란드 과학 매체 '케니스링크(Kennislink)'는 성실하지만 언론 노출은 극히 꺼렸던 이 폴란드 출신 과학자와 '가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사능은 원자의 고유한 특성이다
마리 퀴리는 남편과 함께 방사능이 다양한 화학 물질 속 원자의 근본적인 특성이라는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펼쳤다. 이를 통해 불안정한 동위원소가 자발적으로 다른 종류의 원소로 변하는 자연 현상인 '방사성 붕괴'에 대한 통찰이 열렸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제2의 조국 프랑스에서 보수파 스캔들 언론의 공격 대상이 되곤 했다. 잦은 인신공격과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과학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퀴리 부인, 먼저 이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들과의 대화를 삼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항상 사람이 아니라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현이나 홍보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과학 경력 내내 프랑스 언론과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방사능 연구의 시작
그럼 우선 과학적 업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모두 수상하셨죠. 당시 거의 이해되지 않았던 방사능 연구에 크게 기여하셨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1896년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이 사진 건판에 감광되는 방사선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지만, 베크렐 본인을 포함해 누구도 깊이 연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직전 빌헬름 뢴트겐이 인체 손의 뼈까지 비춰볼 수 있는 신비로운 'X선'을 발견했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쪽이 훨씬 흥미진진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우라늄 방사선이 워낙 새롭고 아무도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분야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라고 하셨는데요…?
"남편 피에르 퀴리와 저를 말하는 겁니다. 1906년 그는 파리에서 끔찍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일은 제 삶의 질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지요. 그 후로 저는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주로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베크렐은 이미 우라늄 방사선이 공기를 전기 전도체처럼 만든다는 점을 알아차렸습니다. 처음에는 논문을 위해 이것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곧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라늄의 전리 방사선은 온도나 조명 같은 외부 요인과 무관하게 일정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라늄이 순수할수록 방사선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활동적인 방출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한 용어인 방사능은 원소 우라늄의 원자적 특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
"이후 다른 물질들도 방사선을 내뿜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금이나 은 같은 금속은 전리 방사선을 내지 않았지만, 토륨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고 무거운 광물인 섬아연광(피치블렌드)을 시험했을 때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통 우라늄을 추출해내던 이 광석이 정작 순수한 우라늄 자체보다 훨씬 강한 방사선을 내뿜었던 것입니다."
"섬아연광의 강력한 방사선이 함유된 우라늄에서만 나올 리 없었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아직 모르는 또 다른 방사성 원소가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여러 개일지도 모르죠. 1898년, 광범위한 화학 분석 끝에 그중 하나를 분리하고 원자 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고향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 명명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훨씬 더 강한 방사능을 지닌 '라듐'도 발견했습니다. 두 원소의 분리를 통해 우리는 오직 방사능이라는 원자의 근본 특성만으로도 새로운 원소를 찾아낼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방사선의 정체를 밝힌 러더포드
놀라운 과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방사성 붕괴의 연쇄 과정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라늄은 시간이 지나면서 붕괴해 토륨으로 변하며 방사선을 방출하죠. 초기에 방사선의 실체에 대한 가설이 있으셨습니까?
"방사선은 물질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상 에너지가 허공에서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라늄이 대기에서 에너지를 흡수한 뒤 다시 방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동료 학자였던 율리우스 엘스터와 한스 가이텔이 실험으로 그 가능성을 빠르게 배제했습니다."
"결국 천재적인 뉴질랜드 출신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포드가 1902년, 비방사성 물질이라도 방사성 물질 근처에 두면 일시적으로 방사성을 띠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즉 방사능이 물질의 성질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죠. 러더포드는 이를 통해 현대 원소변환 이론의 토대를 놓았고, 1908년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한 업적이었습니다."
조국 폴란드와 비밀대학 '플라잉 유니버시티'
발견한 원소 중 하나에 폴로늄이라 이름 지으셨죠. 조국이 늘 마음속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나 봅니다. 왜 폴란드를 떠나 파리로 떠나기로 하셨습니까? 과학적으로 더 좋은 기회가 있어서였습니까?
"좋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만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스워도프스키 가문은 오래된 폴란드 귀족 출신이지만 매우 가난했습니다. 바르샤바에서 보낸 어린 시절 대부분,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금했음에도 아버지는 매일 밤 자정 전에 저와 여동생 브로니스와바에게 폴란드 시를 읽어주곤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민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동생과 저는 우리에게 고등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 여성은 대학에 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지배 하에서는 더더욱요. 그럼에도 폴란드 학계에는 진보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여성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리하여 진정한 비밀 대학이 탄생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자들의 다락방에서 시작해, 이후 동조하는 기관들의 강의실에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플라잉 유니버시티(비행 대학)'라고 불렀습니다."
"언니와 오빠가 먼저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저도 오랜 망설임 끝에 그들을 따랐습니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는 폴란드에서 몰래 배우는 것보다 훨씬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기차에 올랐을 때 심장이 찢어질 듯했습니다."
이후 평생 프랑스에 사셨는데, 폴란드로 돌아갈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소르본을 졸업한 뒤 바르샤바의 가족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하지만 결국 학업 말기에 만난 피에르와 함께 파리에 남기로 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함께 폴란드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두 딸 이렌과 에브 퀴리에게도 폴란드어를 배우고 조국을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두 차례의 노벨상과 언론의 공격
과학 경력 면에서도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1904년 남편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하셨죠.
"1904년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의 발견과 연구로 상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피에르만 후보로 지명되어 있었습니다. 노벨 위원회에는 여성에게 상이 돌아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보수파가 많았습니다. 피에르가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과 분리가 대부분 제 공로라고 밝힌 후에야 저도 후보로 지명될 수 있었습니다."
"노벨상을 계기로 우리는 프랑스에서 갑자기 유명해졌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많은 우경 보수 언론들은 여성이 독립적으로 과학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업적은 주로 피에르의 것으로 돌려졌고, 일부 언론은 실험실에 서 있느니 집안일이나 하라고 쓰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1911년에는 어떻게 두 번째 노벨상, 이번에는 화학 부문을 수상할 수 있었습니까? 한 과학자가 노벨상을 두 번 받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요.
"폴로늄을 분리한 직후, 섬아연광 속에 우라늄이나 폴로늄보다 훨씬 강하게 방사하는 또 다른 방사성 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것을 라듐이라 불렀습니다. 1908년, 즉 피에르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저는 라듐을 순수한 금속 형태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이전까지는 염화라듐 형태로만 분리됐었습니다). 이 업적, 폴로늄 발견, 그리고 방사능이 물질의 원자적 특성이라는 통찰이 1911년 화학 부문 노벨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부 동료 과학자들, 그리고 또 언론은 제가 사실상 같은 과학적 성과로 노벨상을 두 번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라듐의 발견과 분리 역시 화학에 큰 의미가 있는 성과로 평가된 것이죠."
언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 폴 랭주뱅이라는 과학자와의 불륜 사실이 알려졌을 때 언론이 혹독하게 몰아붙였다고 들었습니다.
"글쎄요, 사람들이 왜 늘 제 사생활만 쓰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습니다. 폴과 저는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결혼한 남자였습니다. 프랑스에서 공인이 정부를 두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녀는 뒤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명인이었고요."
"그의 외도 사실이 새어 나가자 언론은 폭풍처럼 몰아붙였습니다. 폴란드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가 프랑스의 도덕을 오염시킨다는 기사가 쏟아졌고, 일부 신문은 제가 유대인이라고 쓰기까지 했습니다. 외국인 혐오와 '진짜 프랑스적이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만연한 시절이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죠."
"1911년 두 번째 노벨상이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그 덕에 국비로 운영되는 저만의 연구소, '라듐 연구소(Institut du radium)'(오늘날의 퀴리 연구소)를 갖게 되었습니다. 언론의 추악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저는 프랑스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직접 설계한 이동식 X선 장비로 군인들의 골절 치료를 도왔습니다. 제2의 조국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좋게 느껴졌습니다."
방사능의 위험, 너무 늦게 알다
당시 언론은 과학적 발견을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물론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구설수와 자극만 좇았습니다. 라듐이 너무 강하게 방사해서 열과 빛을 내고 피부에 붉은 반점을 일으킨다는 점에 흥분했죠. 피에르와 제가 라듐을 암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만능약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언론에 퍼졌습니다. 제조업체들은 라듐을 페인트와 립스틱에 섞기까지 했습니다. 훨씬 후에(1925년경) 특히 여성들에게 입술, 턱, 손가락의 각종 기형이 나타나면서서야 방사능이 극도로 위험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도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방사능 연구로 본인도 병을 얻으셨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저는 골수억제증, 아주 심각한 형태의 빈혈을 앓고 있습니다. 아마도 수년간의 방사선 노출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방사능의 위험성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위험도 모른 채 재료를 손수건에 싸서 가방에 넣어 다니곤 했습니다. 그래도 가능한 한 오래 연구를 계속하려 합니다. 실험실에 설 수 없게 되는 순간, 제 삶은 더 이상 값진 것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