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수십 곳의 박물관, 기록보관소, 대학을 털어 우리 유산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약탈해 갔습니다. 무려 200억 달러에 달하는 폴란드 문화의 손실은 대부분 베를린의 선사시대 교수 파울센과 그의 열성적인 조수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나치 독일에게 폴란드의 거의 모든 기념물과 예술 작품은 '게르만 민족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자, 야만적이고 낙후된 지역에서 '서구 문명의 뛰어난 전파자'로서 게르만 정착민들이 수행한 역사적 '사명'의 흔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2폴란드 공화국이 제3제국에 정복된 후, 폴란드 문화유산을 약탈하라는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이러한 명분 아래 조직된 독일 학자들, 역사가들, 군인들이었습니다.
약탈을 지휘한 '도둑 교수'
문화재 '확보' 작전은 베를린 대학교의 선사고고학 교수이자 SS 친위대 하급돌격지도자(SS-Untersturmführer)였던 페터 파울센(Peter Paulsen)이 지휘하는 특별 부대에 맡겨졌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이 부대가 바로 '아인자츠코만도 파울센(Einsatzkommando Paulsen)'입니다.
현장에서는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부대가 이 '약탈자' 코만도를 지원했습니다. 형식적으로 이 부대는 제국중앙보안본부(RSHA)의 수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의 직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형식적으로 아인자츠코만도 파울센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본인에게 직속되어 있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약탈
아인자츠코만도 파울센이 수행한 가장 중요한 작전은 파울센이 지휘하는 부대가 베이트 슈토스(Veit Stoss)의 제단을 찾아내 제국으로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군은 '명백하게 게르만적 성격'을 지닌 이 조각 예술의 걸작을 빠르게 발견했습니다. 10월 1일, 파울센은 산도미에시(Sandomierz)로 화물차 세 대를 보냈습니다. 그는 이후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베이트 슈토스의 조각상들을 운송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군의 이동이 작업을 매우 방해합니다(...). 산도미에시 대성당에서 온 상자들은 크기가 큽니다. 그중 네 개는 각각 800킬로그램에 달합니다.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트레일러 없이 주행해야 했고, 안전을 위해 낮에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산도미에시에서 발견된 제단 요소들은 처음에는 베를린으로 보내졌고,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결정에 따라 비트 스토슈(Wit Stwosz)의 출생지이자 사망지인 뉘른베르크로 옮겨졌습니다. 작품의 나머지 부분들도 곧 그곳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완전한 형태의 제단은 특별한 방공호에 보관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점령지에서 어떤 예술 작품도 반출되는 것을 반대했던 한스 프랑크(Hans Frank)의 큰 불만을 샀습니다. 더욱이 마리아 제단에 대한 권리를 SS 쪽에서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퓌러는 자신의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었습니다.
강도들 사이의 갈등
더 큰 규모에서 파울센의 활동을 가로막은 것은 빈에서 온 SS 돌격대지도자 카예탄 뮐만(Kajetan Mühlmann) 박사의 도착이었습니다. 그는 1939년 10월 9일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으로부터 점령지 폴란드에서 미술품을 확보할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경쟁하는 두 팀의 '약탈자'가 존재하면서 관할권 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문제는 1939년 10월 28일 크라쿠프에서 열린 회의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날부터 파울센의 그룹은 선사시대 유물과 학술 자료의 '확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갚지 못한 손실
아인자츠코만도 파울센은 10월 말까지 크라쿠프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야기에워워 대학교와 광업 아카데미 연구소의 소장품들이 향후 활용 가능성을 기준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야기에워워 대학교 법학부 도서관 소장품의 일부는 베를린으로 보내졌습니다.
10월 30일, 파울센의 그룹은 바르샤바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의회 도서관(Sejm Library) 소장품의 일부가 제3제국의 수도로 배송되었습니다. 자모이스키 저택 도서관(Zamoyski Estate Library)의 가장 귀중한 자료들은 상자에 포장되어 현지 SD(친위대 보안국, Sicherheitsdienst) 시설로 인계되었습니다.

SS 돌격대지도자 카예탄 뮐만 박사의 도착 이후, 파울센은 선사시대 유물과 학술 자료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사진에서 뮐만이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 역시 수천 점의 전시품과 과학 문헌의 상당 부분을 잃었습니다. 국립 동물학 박물관에서는 동물 표본 컬렉션의 일부, 전문 서적, 광학 기기들이 잘츠부르크로 운반되었습니다.
파울센의 팀은 바르샤바의 대학들도 샅샅이 뒤졌습니다. 독일인들에 따르면, 바르샤바 공과대학교의 기기와 컬렉션을 운송하는 데만 무려 철도 화차 100량과 상당수의 트럭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바르샤바 대학교 도서관 역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소장품을 실어 나르는 데 450~500대의 트럭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독일어문학 세미나의 소장품은 반드시 베를린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조사 대상에는 바르샤바 생명과학대학교, 바르샤바 경제대학교, 폴란드 자유대학(Wolna Wszechnica Polska)이 포함되었습니다.
참고 문헌
이 글은 다리우시 칼린스키(Dariusz Kaliński)의 저서 『피해의 대차대조표: 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실제로 어떠했는가(Balance of harms. What the German occupation of Poland really looked like)』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