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타이타닉호의 탄생지, 벨파스트가 들려주는 100년의 이야기

침몰 100주년, 타이타닉의 고향 벨파스트를 돌아보다

2012년 4월 15일은 세계적인 호화 여객선 RMS 타이타니크가 침몰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릿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 '불침몰' 배의 비극을 기리며, 타이타닉이 건조된 도시 벨파스트를 특별히 조명합니다. 이 배의 건조는 도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침몰 후 벨파스트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1912년 4월 15일, 여객선 RMS 타이타닉은 처녀 항해 중 침몰했습니다. 이 '불침몰' 배의 잔해는 1985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익스플로러 밥 발라드(Bob Ballard)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비극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2년, 타이타닉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의 탄생지』에서 진행자 에디 주이(Eddy Zoëy)는 밴드 MOKE의 보컬 펠릭스 매긴(Felix Maginn)과 함께 타이타닉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벨파스트를 방문합니다. 벨파스트는 펠릭스 매긴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타이타닉호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세계 최대의 드라이독

1908년, 아일랜드 조선업체 할런드 앤 울프(Harland & Wolff)는 해운회사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으로부터 타이타닉과 올림픽을 포함한 거대 선박 3척을 건조하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항구 시설의 대대적인 확장이 필요했는데, 할런드 앤 울프는 세계 최대 규모의 드라이독(건선거)을 건설하여 선박의 프로펠러를 장착하고 선체를 도색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 드라이독에는 무려 9,500만 리터의 물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배가 드라이독에 들어서면 3개의 증기 펌프가 물을 퍼냈는데, 단 1시간 30분 만에 전부 배수하는 놀라운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물이 빠져나간 후에는 배가 수많은 나무 받침대 위에 얹혔습니다. 드라이독이 배 크기에 꼭 맞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타이타닉의 실제 발자국'이라고 불립니다. 드라이독 건설에는 무려 7년이 걸렸으며, 500명의 인부가 주 7일 내내 굴착 작업을 벌였습니다. 총 공사 비용은 약 50만 파운드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300만 파운드가 넘는 금액입니다.

배가 드라이독에 들어가기 전에는 개별 부품들을 먼저 완전히 조립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별도의 건물인 '아롤 갠트리(Arrol Gantry)'가 세워졌습니다. 올림픽과 타이타닉 두 척 모두 이곳에서 건조되었습니다. 또한 완성된 선박이 출항할 수 있도록 조선소까지의 수로를 8미터 더 깊게 준설했습니다. 타이타닉 건조로 무려 3만 명이 일자리를 얻었고, 벨파스트는 폭발적인 산업 성장을 이루며 세계 최고의 조선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당시 항구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벨파스트에는 심각한 종교 간 분리가 존재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은 엄격하게 구분된 지역에 살았고, 서로 큰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러한 분리 구조는 20세기 초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벨파스트 전역에는 개신교 동네와 가톨릭 동네를 가르는 거대한 '평화의 벽(Peace Walls)'이 세워져 있는데, 그 규모는 베를린 장벽보다도 큽니다. 비록 지금은 두 종교가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지만, 벽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펠릭스 매긴은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타이타닉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배 이름과 벨파스트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 그 이상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1958년 영화를 봐야 했죠. 한동안 저는 케네스 모어를 타이타닉의 선장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라고 펠릭스는 말합니다.

항구에서 개신교 신자만 일한 것은 단순히 종교 분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분리주의도 한몫했습니다. 하지만 인맥 문제이기도 했죠.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 항구 일자리를 서로 소개해 주곤 했고, 그러다 보니 가톨릭 신자가 끼어들기는 어려웠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연결망에서 늘 소외되곤 했죠."

바로 이런 이유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타이타닉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벨파스트를 누병하는 저의 길은 하나의 큰 탐험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고향 도시를 큰 자부심으로 바라봅니다. 타이타닉은 당시 인류가 만든 세계에서 가장 큰 움직이는 물체였고, 그것이 벨파스트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라고 그는 덧붙입니다.

그야말로 거대한 배

타이타닉은 정말로 거대한 배였습니다. 선체에만 300만 개의 리벳이 사용되었고, 길이는 268미터, 폭은 28미터에 달했습니다. 배에 탑재된 엔진 하나하나가 3층짜리 건물 크기였으며, 용골부터 측정한 높이는 10층짜리 아파트 건물에 필적했습니다. 이런 거목이 도시에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죠. 타이타닉이 출항할 때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출항을 구경하기 위해 입장권을 구입했고, 티켓 판매 수익금은 벨파스트의 병원에 기부되었습니다.

아무도 도시의 자랑이자 '불침몰'의 상징이던 이 배가 그토록 참담한 재난을 겪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소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요즘 같은 기술이 없었어요. 그래서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죠. '타이타닉'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않았습니다."라고 펠릭스는 회상합니다. 물론 소문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반가톨릭 성향의 부두 노동자가 고의로 배를 파괴했다는 소문, 미라의 저주라는 소문도 있었고, 심지어 타이타닉이 침몰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배와 신분을 바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진실의 이야기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신기루에 의한 착시 현상 때문에 타이타닉의 승무원들은 빙산을 너무 늦게 발견했습니다. 항해사들이 빙산을 목격했을 때는 배의 방향을 틀 시간이 불과 37초밖에 남지 않아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배의 관계자들은 매우 침착하게 행동했습니다. 에드워드 J. 스미스 선장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탈 수 있도록 도왔고, 이 재난의 생존자 해럴드 S. 브라이드(Harold S. Bride)는 마지막 순간에 스미스 선장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배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류스(Thomas Andrews)는 선장에게 배가 침몰할 것이라고 직접 알려야 했습니다. 그 역시 승객들이 안전하고 침착하게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습니다. 앤드류스는 마지막으로 1등실 흡연실에서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목격되었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배와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오늘날의 벨파스트

벨파스트가 타이타닉을 통해 도시의 위상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1998년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식적으로 화해했고, 타이타닉의 침몰이 아일랜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도 인정받았습니다. 벨파스트에서는 거의 격언처럼 통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한 아일랜드 가이드는 이렇게 씁쓸하게 설명합니다. "타이타닉은 아일랜드 항구를 떠날 때 완벽한 상태였습니다. 타이타닉의 선장은 영국인이었고, 항해사는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빙산은 캐나다 것이었죠. 아일랜드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오늘날 타이타닉은 벨파스트의 대표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4월에는 할런드 앤 울프 조선소 근처에 타이타닉 박물관(Titanic Museum)이 개관했습니다. 이 거대한 건물에는 약 1억 파운드가 투입되었으며, 관람객들은 극도로 정교하게 재현된 전시를 통해 마치 타이타닉호 안에 들어온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익스플로러 밥 발라드가 잔해를 발견한 데 힘입어,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은 4월 7일 주말을 타이타닉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밥 발라드와 제임스 카메론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으며, 토요일 밤 9시에는 펠릭스 매긴과 에디 주이가 벨파스트를 찾는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의 탄생지』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