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대공황의 원인과 결과: 미국 경제를 무너뜨린 10년의 기록

1920년대 후반, 전 세계 시장 경제는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충격에 직면했습니다. 국가에 따라 피해의 정도는 달랐지만, 특히 미국에서 그 타격은 처참했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1933년, 미국 전체 노동자의 25%, 비농업 노동자의 37%가 실업 상태에 빠졌습니다.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농장과 집을 잃었습니다. 집을 잃은 이들은 화물열차에 몰래 올라타며 전국을 떠돌았고, 면화 농사로 생계를 꾸리던 '오키(Ookies)'들은 캘리포니아 곳곳에 붙은 일자리 모집 포스터를 믿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부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미국 경제는 1933년 2분기부터 회복 조짐을 보였지만, 1934년과 1935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1935년 말에야 경제가 본격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고, 그 호흡은 1937년 새로운 불황이 닥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까지도 경제는 대공황 이전 수준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회복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1930년대는 미국 역사에서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대공황의 시작

대공황의 원인과 결과: 미국 경제를 무너뜨린 10년의 기록

대공황은 전 세계를 덮친 10년간의 경제 침체기였습니다. 발단은 1929년 10월 24일, 소위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 불리는 날 미국에서 터졌습니다. 이날 투자자들은 공포에 몰려 무려 1,300만 주를 팔아치웠고, 이는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그 결과 미국 증시의 대표 지표인 다우존스 지수는 단 4일 만에 약 25% 폭락했습니다. 하락세는 이후 3년간 계속되었으며, 1929년 10월부터 1932년 7월까지 지수는 약 90%나 증발하고 말았습니다.

증시 폭락은 소비와 기업 투자를 급격히 위축시켰습니다. 그 결과 대공황 초기 몇 년간 미국 GDP는 1929년 1,046억 달러에서 1933년 572억 달러로 급감했습니다. 참고로 2008~2009년 금융위기 최악의 순간에도 GDP 감소폭은 고작 2%에 그쳤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29년 증시 대폭락

1920년대 미국 증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주가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주식 투자는 돈을 버는 쉬운 방법으로 여겨졌고, 평범한 소득의 사람들도 남는 돈은 물론 주택담보대출까지 받아 주식을 샀습니다. 1920년대 말에는 수억 주가 신용거래(margin)로 매입되었습니다. 신용거래란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기대 아래, 그 차익으로 갚겠다고 빚을 내 주식을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다 1929년 10월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하자—언젠가 반드시 왔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과도한 부채를 진 수백만 명의 주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보유 주식을 헐값에 내던졌고, 이는 폭락을 더욱 부추기며 또 다른 공포를 낳는 악순환을 만들었습니다. 주가는 9월부터 11월 사이 33%나 추락했습니다. 이 충격은 사람들의 심리에 큰 상처를 남겼고, 소비자와 기업 모두 경제에 대한 신뢰를 잃게 했습니다. 결국 내구재 소비와 기업 투자가 크게 줄었고, 이는 산업 생산 감소와 실직으로 이어져 다시 소비와 투자 위축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낳았습니다.

어린 중앙은행이 저지른 실수

1929년 폭락 전후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던 연방준비제도(Fed)는 통화와 신용 관리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1913년 설립된 Fed는 처음 8년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1920~1921년 불황이 끝나고 경기가 회복되자 Fed는 통화 공급을 크게 늘리도록 허용했습니다. 1921년부터 1928년 사이 통화량은 총 280억 달러, 즉 61.8%나 증가했습니다. 은행 예금은 51.1%, 저축대부조합 예금은 224.3%, 생명보험 순적립금은 113.8% 늘어났습니다. 이는 1917년 Fed가 지급준비율을 3%로 낮춘 뒤 나타난 현상이었고, 같은 기간 재무부와 Fed를 통해 추가된 금 보유고는 겨우 11억 6천만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Fed는 1920년대 내내 통화 공급을 늘리고 금리를 낮게 유지했고, 이러한 유동성 확대가 폭발적 성장과 함께 증시·부동산 버블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버블이 터지고 시장이 추락하자 Fed가 정반대 정책을 펼쳤다는 점입니다. Fed는 통화 유통량을 3분의 1로 줄였고, 이로 인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소규모 은행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빠른 회복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대공황 속 연방준비제도의 방관

대공황의 원인과 결과: 미국 경제를 무너뜨린 10년의 기록

Fed가 등장하기 전에는 은행 공황이 몇 주 안에 진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큰 민간 금융기관들이 재무 상태가 튼튼한 소규모 은행들에 자금을 빌려주면서 시스템 붕괴를 막았던 것입니다. 20년 전인 1907년 공황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공매도 물량에 의해 급락하고 은행 인출 사태가 일어나자, 투자은행가 J.P. 모건이 직접 나서 월스트리트의 자금을 유동성이 부족한 은행들로 이동시켰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건이 정부가 개인 금융가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연방준비제도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검은 목요일' 이후 뉴욕의 여러 은행들은 우량주(블루칩)를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대량 매입하는 방식으로 신뢰 회복을 시도했습니다. 금요일에는 주가가 잠시 반등했지만, 월요일이 되자 공포에 질린 매도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 이후 증시 규모가 너무 커진 탓에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시장을 안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미국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연방준비제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부터 1932년까지 Fed는 현금을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무런 조치 없이 통화량이 줄어들고 수천 개의 은행이 도산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당시 은행법상 기관들이 충분히 성장·다각화하여 뱅크런이나 대규모 인출 사태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Fed의 냉담한 대응에는 '무분별한 은행을 구제하면 오히려 앞으로 더 무책임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일부 역사학자들은 Fed가 이미 고통받던 경제를 한층 더 악화시켰다고 평가합니다.

은행 공황과 통화량 감소

1930년부터 1932년 사이 미국은 네 차례에 걸친 장기적인 은행 공황을 겪었습니다. 예금자들은 자신의 은행이 돈을 돌려주지 못할까 두려워 동시에 현금을 인출하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은행 공황은 바로 예금자들이 피하려던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집단적 공포는 재정 상태가 건전한 은행마저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1933년까지 1930년에 영업 중이던 은행의 5분의 1이 파산했습니다. 이에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신정부는 4일간의 '은행 휴업령(bank holiday)'을 선포했고, 이후 3일 더 연장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전국의 모든 은행들은 국가 검사관에게 재정적으로 안정하다는 것을 입증할 때까지 문을 닫았습니다.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은행이 줄어들자 소비와 기업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이 현금을 집에 쥐고 있으면서 대출 가능 자금도 크게 줄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인상하고 통화 공급을 축소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Fed는 미국 달러와 여러 나라 통화의 가치를 일정량의 금에 연동하는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통화량 감소로 물가가 떨어지면서 대출과 투자는 더욱 위축되었습니다.

금본위제의 역할

대공황의 원인과 결과: 미국 경제를 무너뜨린 10년의 기록

금본위제가 미국 내 통화 공급에 어떤 영향을 미쳤든, 대공황이 전 세계로 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미국 경제가 위축되고 물가가 하락하자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미국인들이 외국 제품을 덜 사들였고, 수출품은 상대적으로 값싸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균형으로 미국에는 막대한 외국 금이 유입되었고, 금 보유고가 고갈된 국가들의 통화 가치가 하락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외국 중앙은행들은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했고, 그 결과 해당 국가들에서는 물가와 생산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급등했습니다. 결국 세계 경제, 특히 유럽은 미국 못지않은 침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후버의 대공황 대응

경기 침체에 대한 후버 대통령의 첫 번째 대응은 그의 오랜 신념인 자발적 원칙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정부가 경제에 과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개인에게 직접적인 공적 지원을 하면 국민의 인격이 약화된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정부 지원이 사람들의 근로 의욕을 꺾고 국가 배급에 의존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31년경 후버는 정부가 경제를 지원하는 방식에 대해 입장을 바꿨습니다. 1932년에는 부흥금융공사(RFC)를 통해 은행, 철도 및 기타 민간 기업에 20억 달러의 대출을 허용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연방 정부가 구호 사업과 공공사업에 3억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조치는 너무 적었고, 너무 늦었습니다. 임시판으로 지은 허름한 오두막들이 모인 빈민가—당시 위기 속 대통령의 무대응을 조롱하며 '후버빌(Hooverville)'이라 불렸습니다—이 공원과 빈터 곳곳에 생겨났습니다. 모기지나 월세를 갚지 못한 실직자들이 쫓겨나면서였습니다. '후버 깃발(Hoover flag)'은 돈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뒤집어 흔든 빈 바지 주머니를 뜻했고, 추위를 막으려 신문으로 몸을 감싼 노숙자들은 '후버 담요(Hoover rug)'라고 불렸습니다. 결국 1932년 11월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압승을 거두며 당선되었습니다. 루즈벨트는 57.4%의 득표율을 기록한 반면, 후버는 39.7%에 그쳤습니다.

국제 대출과 관세가 초래한 위기

1920년대 후반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시기, 미국 은행들은 해외 대출을 중단했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 내 금리가 높았던 탓도 있습니다. 그 결과 독일,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차입국들의 경제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한편 미국 농민들은 과잉생산과 유럽 등 외국 농민들과의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의회에 농산물 수입 관세 신설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1930년 의회는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광범위한 법률은 농공산품에 평균 20%의 높은 관세를 부과했고, 여러 국가들이 보복 조치에 나서면서 세계적 생산 감소와 무역 위축으로 이어졌습니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대공황의 원인과 결과: 미국 경제를 무너뜨린 10년의 기록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수많은 획기적인 변화를 약속했습니다. 그는 그전까지 없던 새로운 국내 프로그램과 법률의 집합체인 '뉴딜(New Deal)'을 시작했습니다. 그 목표는 미국 기업을 지원하고, 실업을 줄이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뉴딜은 케인스 경제학을 느슨하게 기반으로 했습니다. 케인스 이론은 정부가 경제를 부양할 수 있고, 또 부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뉴딜은 국가 인프라의 건설과 유지,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 제공, 공정한 임금 보장과 같은 야심 찬 목표를 담고 있었으며, 정부는 이를 위해 물가, 임금, 심지어 생산량까지 통제하려 했습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루즈벨트가 후버와 본질적으로 같은 정책을 더 큰 규모로 실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가격 지원과 최저임금에 강력하게 집중했고, 미국을 금본위제에서 이탈시켰으며, 개인이 금화와 금괴를 보유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독점 기업 운영도 불법화했습니다. 여기에 수십 개의 새로운 공공사업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 기구들을 만들었습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농부와 목장주들에게 생산을 중단하거나 줄이는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그 결과 수천만 미국인이 저렴한 식량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도 잉여 농작물이 버려지는 역설적인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이러한 프로그램과 사회보장(SS) 같은 새로운 제도를 충당하기 위해 연방 세금은 3배나 증가했습니다. 특별세, 개인소득세, 상속세, 법인소득세, 초과이익세 등도 인상되었습니다.

뉴딜의 성과와 한계

뉴딜은 금융 시스템을 개혁·안정시켜 국민들이 미래에 대해 다시 희망을 갖게 하는 등 확실한 성과를 냈습니다. 1933년 3월 루즈벨트는 공황으로 은행들이 도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주일간 은행을 폐쇄했고, 이후 댐, 교량, 터널, 도로를 짓는 대규모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프로젝트들은 연방 고용 프로그램을 통해 수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회복 조짐을 보였음에도, 뉴딜이 미국을 대공황에서 완전히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고 단언하기엔 회복의 속도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케인스 학파는 루즈벨트의 공공 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 계획이 충분히 과감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루즈벨트가 후버처럼 즉각적인 개입을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불황을 더 길게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한 연구는 뉴딜이 대공황을 원래보다 7년이나 더 길게 만들었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1929년 이후 경제가 다른 시기처럼 빠르게 회복하지 못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대중 대부분이 증시에서 큰돈을 잃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루즈벨트의 새로운 규제들은 너무 빠르고 급격하게 도입되어 기업들이 사람을 고용하거나 투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루즈벨트가 케인스식 거시 경제 부양책보다 사회복지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보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변화

1941년에서 1942년 무렵, 대공황은 갑자기 끝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용률과 GDP를 살펴보면 불황은 사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직전에 끝났습니다. 1940년에는 800만 명이 실업 상태였지만, 1943년에는 100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다만 1,600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 기간 민간 부문에서 일자리 없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배급제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생활 수준은 하락했고, 전비 조달을 위해 세금도 크게 인상되었습니다. 그 결과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민간 투자는 179억 달러에서 57억 달러로 급감했고, 민간 생산량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대공황을 종식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지만, 분명 전쟁은 미국을 회복의 길에 올려놓았습니다. 전쟁은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을 활성화했고 물가·임금 통제를 종식시켰으며, 정부가 저렴한 제품들을 대량 구매하면서 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첫해에 민간 투자는 106억 달러에서 306억 달러로 폭증했고, 그 결과 증시는 불과 몇 년 만에 강세장(bull run)을 맞이했습니다.

결론

대공황은 방향을 잃은 연방준비제도의 정책 변화, 보호무역주의적 관세, 그리고 항상 잘 작동하지 않았던 정부의 경제 개입이 뒤섞여 빚어진 참담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이 요소들이 달리 작용했다면 불황은 더 짧아졌거나 아예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개입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사회보장, 실업보험, 농업 보조금 같은 뉴딜의 많은 개혁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국가적 경제 위기가 닥치면 연방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강력한 지지 여론도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공황은 현대 미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