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다양한 민족, 문화, 종교가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복잡하고 풍부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외세의 침략과 점령 이야기에는 익숙하지만, 침략 의도 없이 스스로 이 땅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합니다. 오늘 소개할 파르시(Parsi) 공동체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이 글에서는 파르시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인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남긴 업적과 독특한 문화, 그리고 현재의 위상까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파르시인은 누구인가?
파르시인은 인도의 소수민족 집단으로, 인류 최초의 일신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를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7세기경 사산 제국(신(新)페르시아 제국)에서 도피해 온 조로아스터교도들의 후손입니다. 현재 인도 전체 인구의 약 0.01%에 불과하지만, 인도 사회에 기여한 바가 워낙 커서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공동체 중 하나로 꼽힙니다.
파르시인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캐나다, 미국, 영국,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나라에 거주하고 있지만, 가장 많은 파르시인이 거주하는 곳은 인도입니다.
역사: 이란에서 인도까지
7세기 아랍인들이 사산 제국을 침공하여 왕 야즈데게르드 3세를 패배시키면서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제국의 국교였습니다. 그러나 아랍 세력이 지배권을 잡으면서 주민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고,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개종도 세금 납부도 거부한 일부 사람들은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8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걸쳐 장거리 여행 끝에 마침내 인도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주 경로와 이란 사람들이 이슬람화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학자들은 단순한 종교 박해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당시 도피한 사람들이 상인 가문 출신이었으며, 조로아스터교도만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추정합니다. 아랍 지배자들은 비무슬림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상품에 높은 세금을 부과해 무역 기회를 제한했습니다. 결국 경쟁력을 잃은 이들은 새 터전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이란 북부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이후 페르시아만 호르무즈 섬의 호르무즈 시로 이동했습니다.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자 작은 배를 타고 아라비아해를 건너 인도의 디우 섬에 도착했고, 마침내 인도 구자라트 주의 산잔(Sanjan) 지역에 안착하게 됩니다.
이 이론은 당시 중요한 무역 항구였던 산잔을 목적지로 선택한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즉, 그곳에서 더 나은 경제적 기회를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잔에서의 만남
산잔에 도착한 이들은 현지의 왕, 즉 라자(Rajah)였던 자디 라나(Jadi Rana)를 알현하게 됩니다. 조로아스터교 사제 한 명이 대표로 나서 왕과 대화를 나눴는데, 처음에 왕은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그때 사제는 정중하게 우유와 설탕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설탕을 떠 우유 한 잔에 녹인 뒤, 그 모습을 자신들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설탕은 우유의 맛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더 좋게 만듭니다. 저희도 이곳에 들어온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왕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고 그들의 정착을 허락했습니다.
- 자신들의 종교를 설명할 것
- 모어 사용을 접고 구자라트어를 채택할 것 (기도와 종교 행사 시는 예외)
- 파르시 여성들은 고유 의상 대신 사리를 입을 것
- 파르시 남성들은 무기를 소지하지 말 것
- 혼례는 해 진 뒤에만 올릴 것
이러한 조건들은 그들이 인도 사회에 동화되도록 돕고, 개종을 강요하려는 현지인들의 압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파르시인들은 이 조건들을 받아들였고, 두 세기의 유랑 끝에 마침내 자신들의 터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자라트에 정착한 후 그들은 장인, 잡화 상인, 농부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며 공동체는 해안가를 따라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산잔은 무역항으로서의 위상을 잃었고, 파르시인들도 서서히 구자라트와 마하라슈트라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조상들이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해를 건너 산잔까지 이주한 이야기는 키사-이-산잔(Qissa-i-Sanjan), 즉 '산잔의 이야기'라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세기에 문자로 기록되기 전까지 이 이야기는 구전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봄베이로의 이주
구자라트를 떠난 많은 파르시인들이 마하라슈트라 주의 봄베이(현재의 뭄바이)로 향했습니다. 17~18세기 유럽 상인들이 인도에 거점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봄베이 역시 무역항이 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고, 파르시인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잡았습니다. 이후 봄베이의 파르시 인구는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식민지 시대 영국과의 인연
19세기 영국이 중국과 아편·비단 무역을 하던 시절, 해적과 밀수꾼을 만나는 위험한 항해에 동행할 강인한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파르시인들이 최우선 선택이 되었습니다. 과거 봄베이에서 벌어진 무슬림-파르시 분극에서 그들의 능력을 목격한 영국인들의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공동체는 영국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 새로운 직업을 통해 점차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새로 얻은 부 덕분에 그들은 곧 자신들의 선박을 소유하고 독립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평범한 인도 원주민에게는 사치품처럼 여겨지던 영어 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여유도 생겼습니다.
영어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는 점차 서구적 방식을 받아들이며 자유주의적 사상가로 변모했습니다. 그 결과 파르시인들은 교양 있고 진보적이며 성공적인 집단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인도인들은 이를 영국에 아부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인도 사회에 남긴 업적
파르시인들은 언제나 인도 인구의 극소수였지만, 그들의 존재는 인도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언제나 기업가 정신이 넘쳤습니다. 실제로 아시아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봄베이 증권거래소, 인도 최초의 제철소, 최초의 은행, 최초의 항공사, 최초의 호텔, 최초의 공립병원 등을 설립한 주역이 바로 파르시인들이었습니다.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찾은 이들은 은행가, 상인, 엔지니어, 기업가, 배우 등 최상위 전문직에서 활약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인도 최고의 기업가, 사업가, 억만장자 중 상당수가 파르시 출신입니다.
경제적 성공뿐 아니라 자선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문화에 뿌리내린 특성으로, 선행을 실천하라는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 때문에 파르시인들은 인도에서 가장 자선 활동이 활발한 사람들로 꼽힙니다. 도로, 공중보건센터, 교육기관, 호텔 건설 등에 기여했는데, 예컨대 19세기 봄베이에 인도 최초의 의과대학인 그랜트 의과대학(Grant Medical College)을 설립한 것도 저명하고 매우 성공한 파르시인 잠셋지 지지보이(Jamsetjee Jejeebhoy)였습니다.
인독립운동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파르시 여성 마담 카마(Madame Cama)는 인도 독립운동을 위한 문학 활동에 헌신했고, 파르시인 다다바이 나오로지(Dadabhai Naoroji)는 인도 국민회의(INC)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습니다. INC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 이끈 정치 세력 중 하나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파르시 인물들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퀸(Queen)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는 파르시 혈통입니다.
호미 바바(Homi Bhabha)는 핵물리학 분야의 연구 성과로 '인도 핵연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은 파르시 과학자로, 인도 핵 프로그램 설계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타타(Tata), 고드레지(Godrej), 와디아(Wadia) 가문은 인도 최고의 산업을 이끄는 가문들입니다.
파르시의 생활방식, 정체성, 관습
종교는 파르시 정체성의 핵심이지만, 모든 조로아스터교도가 파르시인은 아닙니다. 조로아스터교도에는 '이라니(Irani)'라고 불리는 집단도 있는데, 이들은 19~20세기에 이란에서 인도 서해안, 즉 구자라트와 마하라슈트라 주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파르시인은 8~10세기에 인도로 온 조로아스터교도들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두 용어는 혼용되지만, 생활방식, 언어, 이름 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나브조트(Navjot)'라는 입교 의식을 통해 조로아스터교도가 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르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파르시의 정체성은 오직 출생을 통해서만 계승됩니다.
오늘날 파르시인들은 주로 뭄바이(구 봄베이)와 구자라트 일대에 거주합니다. 소수의 파르시인들은 첸나이, 콜카타 같은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한 인도의 다른 도시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파르시로서의 정체성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파르시인에 대한 통념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특별한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하고, 근면하며,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교육은 진보의 열쇠이며, 무엇보다 직업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은 대체로 긍정적인 특질로 여겨지지만, 모든 파르시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
19세기 영국 식민 당국은 지배 지역 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인도인 성씨 목록을 요구했고, 어떤 기록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성을 갖도록 의무화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파르시인들은 직업이나 출신지와 관련된 성씨를 채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진주 상인을 뜻하는 '모티왈라(Motiwala)', 천과 직물을 다루는 사람을 뜻하는 '카파디아(Kapadia)', 타네(Thane) 출신을 뜻하는 '타네왈라(Thanewala)' 등이 그것입니다.
언어
오늘날 파르시인들은 영어, 구자라트어, 힌디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모어는 '아베스타어(Avestan)'로 알려져 있으며, 이 언어는 기도와 종교 의식에 사용됩니다.
종교
조로아스터교는 파르시 정체성의 심장부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약 3,500년 전 페르시아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창시한 일신교로, 신도들은 오직 하나의 신만을 믿습니다. 이 일신교 개념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되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 세력의 개념 역시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세 아브라함 계통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원리입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가 신이고, 아리만(Ahriman)이 악을 상징합니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불, 물, 공기, 흙 같은 자연의 요소를 숭배합니다. 그중에서도 불은 신의 아들이라 여겨지는 최고의 숭배 대상으로, 모든 의식과 의례는 반드시 불 앞에서 거행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불을 생명과 빛을 창조하는 신성한 에너지로 여기는데, 이는 불과 자연 요소를 숭배하는 힌두교 신앙과 놀랄 만큼 유사합니다.
불은 단향 나무와 기름을 연료로 밝힙니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의 가장 중요한 예배 장소인 불교(火廟, Fire Temple)의 성화는 결코 꺼져서는 안 되며, 항상 타올라야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인도로 이주한 파르시인들은 그 긴 여정 내내 이 영원한 불꽃을 몸소 지켜 왔다고 합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는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이라는 원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사소한 일이라도 성실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정성껏 수행하는 것을 믿습니다.
축제와 의식
파르시의 축제는 화려하게 알리지 않고,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조용히 치러집니다. 축제는 가정이나 불교(火廟), 혹은 특정 장소에서 열리며,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마다 복잡하고 정교한 의식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나브조트(Navjot)'는 조로아스터교의 새 신자와 아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입교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한 사람이 종교에 들어섰음을 상징하며, 의식 중 사제가 '쿠스티(Kusti)'라 불리는 성스러운 허리띠를 허리에 세 번 감아줍니다. 이 끈은 평생 절대 풀어서는 안 됩니다.
'파테티(Pateti)'와 '나브로즈(Navroz)'는 각각 파르시의 새해 전야와 새해를 뜻하는 축제로, 그레고리력으로는 8월에 해당합니다. 이날 신도들은 불교(火廟)의 꺼지지 않는 성화에 단향 나무를 올리고, 달콤한 간식을 나누며 함께 축하합니다.
장례
파르시인들은 죽은 자를 묻거나 화장하지 않습니다. 시신이 자연의 요소인 공기, 흙, 물을 오염시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시신을 '침묵의 탑(Tower of Silence)'이라 불리는 지붕 없는 탑 위에 안치합니다. 이 탑은 지름 약 27미터(90피트), 높이 6미터(20피트) 이상의 원형 건물로, 테라스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우물 형태의 구덩이가 있습니다. 시신은 독수리와 매가 먹을 수 있도록 탑 위에 놓이며, 살이 다 제거된 뼈는 구덩이에 버려져 자연스럽게 부패하도록 둡니다.
도시화로 독수리 수가 급감하면서, 오늘날 일부는 전기 화장터를 대안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상
파르시의 전통 의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성
흰색 카프탄 스타일의 재킷에 끈으로 묶는 흰색 헐렁한 바지를 입고, 카프탄은 흰 천으로 허리에 고정합니다. 이 차림새를 '두글리(Dugli)'라고 부릅니다. 머리에는 흰 터번이나 '페타(Pheta)'라 불리는 검은 납작 모자를 씁니다.
여성
여성들은 사리를 입지만, 일반적인 사리와는 두르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깨에 걸치는 천, 즉 '팔루(Pallu)'를 보통의 왼쪽이 아닌 오른쪽 어깨로 넘깁니다.
여성들은 '가라(Gara)'라 불리는 특별하고 독특한 파르시 사리를 입기도 합니다. 실크나 시폰 소재에 정교하고 화려한 자수가 놓인 사리로, 가라는 파르시인을 중국과 영국 간의 역사적인 아편 무역과 이어 줍니다. 가보로 전해지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오리지널 가라는 중국 장인들이 손으로 수놓은 작품으로, 디자인에는 탑, 사원, 다리 등 중국풍 이야기가 페르시아 전통의 꽃무늬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오리지널 가라의 가치는 최소 10만 루피에 달합니다.
요리
파르시 요리는 렌틸콩, 채소, 쌀 같은 인도의 주재료에 계란과 고기를 즐기는 취향을 결합합니다. 요리에는 거의 항상 계란이 토핑으로 올라가며, 채소 요리에도 노른자가 위로 향한 계란 프라이가 얹히곤 합니다.
레시피에는 인도 향신료를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생강, 마늘, 양파 같은 향신 채소를 듬뿍 넣습니다. 또한 황설탕의 일종인 자거리(jaggery)와 식초 같은 신맛 재료를 활용해 매운맛, 단맛, 신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맛을 만들어냅니다.
디저트로는 플란이나 크렘 카라멜과 비슷한 푸딩인 '라간 누 커스터드(Lagan nu Custard)'가 대표적인 축제용 디저트로, 특히 결혼식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줄어드는 인구
오늘날 파르시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며 인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2014년 기준 약 6만 9천 명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이종교 간 혼인에 대한 엄격한 규정과 낮은 출산율의 결과입니다.
높은 교육 수준을 지닌 집단인 만큼 여성들이 결혼 전에 커리어를 먼저 쌓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 결혼 연령이 높아지며 출산율이 낮아집니다. 아이를 낳더라도 대개 한 명을 넘지 않으며, 아예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갖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파르시 사회에서 이종교 간 혼인이 점점 흔해지고 있는데, 규정에 따르면 비(非)파르시와 결혼한 여성은 더 이상 파르시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 자녀 역시 파르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는 파르시의 혈통이 남계를 통해 이어진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파르시 남성이 비파르시 여성과 결혼하더라도 남성과 그 자녀는 여전히 파르시로 인정됩니다.
오늘날 이 공동체는 정체성과 인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해결책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그들의 문화와 존재가 유산과 유업을 통해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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