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2월 3일, 피로 물든 거대한 EAM(그리스 민족해방전선) 집회가 열린 지 75년이 지나는 동안, 이 학살이 1946~1949년 내전의 서곡이었다는 견해가 수차례 제기되어 왔다. 이는 본질적으로 논쟁의 여지조차 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그러나 75년이 지난 지금도, 최근 그리스 역사학자들의 치열한 연구가 수많은 '어두운' 지점들을 밝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있었던 여러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고 혼란이 존재한다. 현재 아테네에서 매력적인 역사 워킹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역사학자 메넬라오스 하랄람비디스(Menelaos Charalambidis)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이 사건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역사적 진실의 언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우리는 1944년 12월 3일과 관련된 네 가지 '논쟁적인' 질문을 던졌고, 그 답변은 수년간의 연구 성과이자 하랄람비디스의 저서 『1944년 12월, 아테네 전투』(알렉산드리아 출판사)에 상세히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최초의 발포는 누구였는가? 시위대는 무장하지 않았는가?
(왜 오늘날에도, 아니 오히려 오늘날 더욱이 학살이 무장한 EAM 측의 발포로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될까?)
먼저 객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 그리스인들의 증언은 잠시 접어두자. EAM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국군·미군 병력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심지어 'X' 조직 소속 파르마키스의 증언조차, 경찰만이 관련 명령에 따라 발포했다고 밝히고 있다.
질문의 후반부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렇다, 대규모 집회에는 무장한 EAM 민병대원들도 있었다. 독일 점령에 맞선 EAM의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경비 인원들은 발포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한 민병대원은 "아무것도 할 시간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EAM 차원의 반격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경비 배치는 조직적인 시위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 가까웠고, 민병대원의 수도 결코 많지 않았다.
종합하자면, 누가 먼저 쏘았는가는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치안부대 쪽에서만 발포가 있었던 것이다.
그날 아침, 파판드레우 총리 관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당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도심 바실리시스 소피아스 거리 14번지에 저택을 두고 있었다. 도시 동부 지역의 시위대가 대규모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내려오던 바로 그때, 헌병이 배치되어 있던 총리 관저 앞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헌병 측의 주장에 따르면, 시위대원 중 한 명이 즉석 폭탄으로 관저를 공격하려다 폭탄이 손에서 터지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반면 시위대 측의 주장은 정반대다. 폭탄 같은 것은 없었으며, 관저 앞에 배치된 헌병들이 발포해 두 명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한 명의 사망은 확실히 확인되었고, 세 번째 사망자가 있었다는 추측도 있으나 공식 조사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처치런은 왜 소풀리스 총리의 거국 연립정부 제안을 거부했나
같은 날인 12월 3일 오후부터 이미 배후에서 정치적 교섭이 시작되며, 교착 상태 타개를 위한 정치적 해법이 모색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타그마 광장의 참극과 수십 명의 사망자 이후, 파판드레우가 더 이상 총리직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그리하여 영국 측, 파판드레우 본인, 그리고 EAM 등 여러 방향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파판드레우는 사임했지만, 윈스턴 처치런은 자신의 외무장관마저 반대했음에도 사임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상 무력 충돌 선택으로 상황을 몰아붙인 영국의 두 번째 대규모 개입이었다.
처치런이 거부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 총리는 무력 충돌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 진행 중이었고, 처치런은 EAM에게 정치적 패배를 안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파판드레우의 사임은 곧 그의 패배를 의미했다. 그는 결국 실제로 그렇게 된 것처럼, 사태를 무력으로 강행해 종결짓기를 원했던 것이다.
12월 3일의 사망자는 몇 명이며, 어느 쪽에서 나왔나
"제 연구 결과, 그날 신타그마 광장에서 헌병의 발포로 15명이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발포에 의한 것으로 거의 확실한 추가 사망자 5명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소 20명의 사망자를 말할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EAM 측 시위대원입니다. 부상을 입고 며칠 뒤 병원에서 숨진 이들도 있지만, 이런 사망자들을 교차 검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반대 진영에도 사망자가 한 명 있다. 교통경찰 요한니스 람브로풀로스(Yiannis Lambropoulos)로, 그의 죽음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그가 12월 3일 당일 사망했는지, 그 이후인지, 그리고 정확히 어떤 경위로 죽었는지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다.
결말 — 피할 수 없었던 유혈 사태
결국 유혈 사태는 막지 못했다. 다음 날부터 테세이온 전투와 함께 양 진영 간의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ELAS(그리스 인민해방군) 2개 대대가 'X' 조직과 충돌하면서, 분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 전투는 1945년 1월 6일, 영국군과 그리스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체결된 바르키자 협정은 사실상 이행되지 못했고, 결국 동족상잔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