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도 연금이 있었나요? 천 년 전, 누가 노인들을 돌보았을까?
오늘날과 달리 중세에는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장 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늙어가는 부모를 부양하는 책임은 온전히 자녀들의 몫이었는데, 특히 시골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자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고, 그 의무 목록은 오늘날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대체로 무엇이 요구되었을까요?
살아 계신 아버지가 경작하던 땅을 아들에게 넘기면, 아들은 부모를 위해 방을 마련하고 식량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여러 판본으로 전해지는 중세 이야기 『나뉜 담요(The Divided Horsecloth)』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물 한 잔"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된 자녀들은 부모에게 거처, 음식,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까지 제공해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늙은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은 농부가 부모 부양에 지쳐 아버지를 내쫓으려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낡은 담요를 가져다 아버지에게 주며 집을 떠나라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손자는 담요를 반으로 잘라 할아버지에게 한 쪽만 주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머지 반은 내가 크면 당신에게 드리려고 남겨둘 겁니다."
계약 위반에는 벌금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노년을 자녀의 효심이나 운명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법정에서 자녀 각자의 의무를 꼼꼼하게 문서로 적어 두었고, 이를 어길 경우 벌금으로 처벌받았습니다.
1278년, 램지 수도원 소유 엘링턴 영지에서 윌리엄 코크는 아버지에게 땅을 물려받은 계약에 따라 1년 치 곡물, 완두콩, 콩을 지급하지 않았음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새로운 계약이 맺어졌고, 윌리엄의 보증인 두 명은 6펜스의 벌금을 물었습니다. 당시 펜스가 은화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1294년에는 램지 수도원 영지의 또 다른 마을인 크랜필드의 한 가족이,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할 상황까지 미리 예상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엘리아스 드 브레텐던과 그의 아들 얀은, 얀이 엘리아스와 그의 아내 크리스틴에게 자신의 집에서 "충분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특히 시골에서는 늙어가는 부모를 부양하는 부담이 성인이 된 자녀들에게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장차 당사자들 사이에 말다툼과 불화가 생겨 함께 살 수 없게 되면", 얀은 엘리아스와 크리스틴, 혹은 그중 생존한 사람에게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집과 마당"을 제공해야 했으며, 곡물·완두콩·콩의 지급량까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었습니다. 젊은 세대와 다투게 될 경우, 노부부는 가구, 농기구 등 모든 소유물을 가질 권리도 보장받았습니다.
중세의 '연금' 제도
자녀는 부모에게 일종의 '노후 자산'이었습니다. 흔한 통념과 달리 중세 농촌의 평균적인 가족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잘해야 조부모, 결혼한 장남과 그 아내, 집에 남은 미혼 형제자매, 그리고 드물게 하인 한두 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따라서 부모 한두 분을 부양하는 부담이 여러 자녀에게 고르게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간편한 방법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노후를 자녀와 함께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 아들이 농장을 물려받은 뒤 미망인(또는 홀아비)의 노후를 보장하는 또 다른 방법—비교적 형편이 좋은 농민만 이용할 수 있었지만—근처 수도원에서 '코로디(corrody)'라고 불리는 일종의 노령·질병 연금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디는 수도원 주방에서 매일 제공되는 빵과 맥주, 걸쭉한 수프 배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경우에 따라 장작, 방, 하인, 1년에 한 번씩 새 옷과 신발과 속옷, 촛불, 사료, 마구간 자리까지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연금 중 어떤 것은 기본 필수품만 포함된 소박한 수준이었지만, 어떤 것은 훨씬 화려했습니다. 1317년 윙컴 수도원에서 한 여성이 무려 140마르크라는 큰돈을 들여 산 연금이 그 예입니다. 그녀는 매일 두 개의 '수도원 빵'과 흰 밀가루 빵 하나, 그리고 2갤런(약 9리터)의 수도원 맥주를 받았고, 연간 돼지 6마리, 거세소 2마리, 치즈 12개, 말린 바닷물고기 수백 마리, 청어 1,000마리, 마지막으로 24실링어치의 옷까지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 일부 지역에서는 공동경작지나 임대 계약으로 농장 전체를 물려받은 미망인에게 훨씬 후한 특권이 현지 관습으로 보장되었습니다. (...) 그런 미망인은 땅을 아들에게 다시 물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1312년 컥섬의 존 보베처치("교회의")가 사망하자 미망인 조안이 뒤를 이었지만, 그녀는 마을의 집과 밭 한 구획을 아들 엘리아스에게 맡겼습니다. 엘리아스는 존의 농장 안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았습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오두막을 지어주고 일정량의 음식과 옷을 제공하기로 합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미망인이 집에서 "집 끝방"에 머무르며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았고, 아들과 며느리는 그녀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옷과 신발을 제공했습니다. 아버지가 농장을 아들에게 넘기는 계약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이런 계약 역시 영지의 사법 당국에 의해 엄격히 집행되었습니다.
예컨대 램지 수도원 소속 워보이스 영지에서는 1334년 대장장이 스티븐이 "의도한 대로 어머니를 부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6펜스의 벌금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배심원들은 스티븐의 어머니가 평생 그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판결했으며,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 스티븐은 이 땅에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고 선고했습니다.
출처
이 글은 프랜시스 & 조지프 기스(Frances and Joseph Gies) 저서 『중세 여성의 삶』(즈낙 호리존 출판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제목, 리드, 삽화와 캡션, 볼드체, 소제목은 편집부가 붙였으며, 문단 구분을 더 세분화하는 등 기본적인 편집을 거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