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탐사와 원정 역사에서 날씨는 때로는 강력한 동맹으로, 때로는 무자비한 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각 지역의 기후 조건과 해류, 바람을 잘 파악한 자들은 상업 항해뿐 아니라 공격과 방어 작전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역사상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기원전 524년, 사하라 사막에서 거센 모래폭풍과 함께 사라진 페르시아 정예군 5만 명의 행방입니다.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5만 대군의 최후
헤로도토스는 『역사』 3권 ‘탈레이아’에서 키루스 대제의 아들 캄비세스가 기원전 525년 이집트 정복에 이어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 정복에 나섰다고 전합니다. 그는 세 개의 원정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카르타고로 향하는 길, 또 하나는 시와(Siwa) 오아시스, 마지막은 에티오피아(쿠슈)였습니다. 테베에 주둔하던 캄비세스는 함대를 카르타고로 진격시키는 한편, 5만 명의 원정군을 시와로 파견해 반항적인 주민들을 복속시키고 ‘아몬-제우스 신전’을 불태우라고 명령했습니다. 헤로도토스(3.26)에 따르면 캄비세스가 아몬 신탁소의 파괴를 명령한 이유는, 그 신탁의 사제들이 자신의 이집트 왕위 계승을 정당화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페르시아인들이 오아시스 도시를 떠나 아몬인들을 향해 사막을 건너던 중, 두 지점의 중간쯤 와서 식사를 하던 때에 커다란 폭풍이 몰아치며 그들을 모두 파묻었다. 이렇게 그들은 행방불명되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목격자’의 기록
헤로도토스의 이 기록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5만 명의 대군이 목격자 하나 없이 증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 현장을 증언한 이는 헤로도토스뿐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 ‘비역사적’ 주제는 오랫동안 학계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1874년 4월, 독일의 저명한 이집트학자 하인리히 브루그슈 베이가 이집트 연구원(Institut Égyptien) 회의를 주재했을 때도 캄비세스 군대의 ‘터무니없는’ 최후가 핵심 의제로 다뤄졌습니다.
1933년 1월에는 영국군 장교 오드 찰스 윙게이트가 당시 리비아 사막으로 불리던 이집트 서부 사막에서 잃어버린 군대를 찾았지만 실패했습니다. 1977년 2월에는 고고학자들이 캄비세스 군대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지만, 곧 허위로 판명됐습니다. 1983년 9월부터 1984년 2월까지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게리 차페츠가 하버드 대학교, 내셔널 지오그래픽, 이집트 지질광물조사국, 리가부에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리비아 국경 지대를 따라 탐사대를 이끌었습니다. 6개월간의 탐색은 무인 바하리야 오아시스에서 시와 오아시스까지, 사구로 가득한 100㎢에 달하는 지역을 뒤졌지만 유의미한 성과는 없었습니다.
카스틸리오니 형제의 우연한 발견
이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고고학자는 없는 듯했습니다. 단 두 명의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제작자, 안젤로와 알프레도 카스틸리오니 쌍둥이 형제를 제외하고는요. 형제는 1996년 시와 근처에서 철 운석 흔적을 조사하다 이 미스터리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들이 우연히 발견한 것은 모래폭풍 은신처로 보이는 장소에 반쯤 묻힌 점토 항아리와 인골이었습니다. 함께 조사하던 카이로 대학교 동료의 금속 탐지기가 신호를 울렸고, 땅속에서는 은 팔찌, 전사의 귀걸이, 목걸이 구슬, 청동 검 자루, 그리고 여러 화살촉이 나왔습니다. 이 유물들은 모두 현대 과학 분석을 통해 캄비세스 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형제는 이집트 지질조사국에 발견 사실을 공식 통보했지만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고, 이집트 최고 고대유물위원회는 조사 착수를 발표했으면서도 그 경위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형제의 추리는 이렇습니다. 헤로도토스가 말한 ‘오아시스 도시’는 오늘날의 카르가(Kharga)라는 것. 캄비세스 군대는 그곳에서 잊혀진 남쪽 길을 택해 방비가 허술한 쪽에서 시와를 기습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막을 7일간 행군한 그들은 지도가 가리키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시와에서 남쪽으로 100km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오 무렵, 사막의 무서운 남동풍 ‘함신(Hamsin)’이 일어나 온 하늘이 모래로 뒤덮였습니다.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은신처를 찾았지만 대부분 산 채로 파묻혔습니다. 암반의 돌출된 바위 틈을 발견한 소수만이 한동안 생존했는데, 1996년 카스틸리오니 형제가 발견한 장소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은신처는 길이 35m, 높이 약 2m, 깊이 3m의 암석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형제의 활동은 논란이 많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라는 ‘과거’와 공식 학술 논문 없이 발견을 발표한 점 때문에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야기가 세간에 퍼지자 이집트 최고 고대유물위원회는 이 모든 것이 근거가 없으며, 카스틸리오니 형제에게는 발굴 허가가 없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모래폭풍이 아니라 ‘매복’이었다는 또 다른 견해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의 고고학 교수 올라프 카페르(Olaf Kaper)는 이 군대의 행방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군대는 모래 언덕 밑에 파묻힌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군대의 최종 목적지는 이집트 반군 페투바스티스 3세(Petubastis III)의 부대가 주둔하던 다클라(Dakhla) 오아시스였습니다.
페투바스티스는 캄비세스 군대를 매복 공격해 궤멸시켰고, 이 승리를 발판으로 이집트의 상당 부분을 되찾아 멤피스에서 파라오로 즉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페르는 이 군대의 운명이 그토록 오랫동안 외면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캄비세스의 패배 2년 뒤 이집트 반란을 진압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가, 전임자의 굴욕적인 패배를 자연재해, 즉 모래폭풍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페르시아군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공식적인 설명은 사건 약 75년 뒤 헤로도토스마저 받아들이면서 정설로 굳어졌습니다. 카페르가 다클라 오아시스에서 진행한 발굴에서는 초기 페르시아 시대 신전에 새겨진 ‘페투바스티스’라는 이름의 비문이 확인되어, 이 지역이 그의 거점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카페르는 발굴 성과와 페투바스티스 관련 기록을 결합해 퍼즐 조각을 맞추고, 군대 ‘실종’의 미스터리에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하게 된 것입니다.
카페르 교수가 다클라 오아시스의 알메이다에서 진행한 발굴에서는 고대 신전 정면에 새겨진 페투바스티스 3세의 칭호도 드러났습니다. 카페르는 “신전의 석재들은 이 건물이 페르시아 점령 초기에는 요새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페투바스티스 3세에 대한 정보가 더 확보되면서, 우리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추가 조사가 고대 최대의 미스터리 하나에 더 많은 빛을 던져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막의 혹독함과 캄비세스의 적들의 기습이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다는 것이며, 이 사건 이후 캄비세스는 정신의 평정을 잃고 가까운 친족들을 모두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끝냈다는 점입니다.
참고 자료
출처 1. greek-language.gr 고대 그리스 문헌 디지털 도서관
출처 2. Daily Mail – “잃어버린 페르시아 군단은 매복으로 전멸했는가?”
출처 3. 『나비의 이야기(The Story of a Butterfly)』 – Th. 콜리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