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3'이라는 숫자가 영원히 새겨진 비극… 그리스 에브리타니아의 작은 마을 미크로 호리오

그리스 에브리타니아(Evrytania)의 메갈로 호리오(Megalo Chorio) 바로 맞은편, 헬리도나 산(Mount Helidona) 기슭의 울창한 전나무 숲 속에는 인구 20명 남짓의 조용한 마을 '미크로 호리오(Mikro Chorio)'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처럼 작은 이 마을은 그리스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마다 앞장서 온 놀랍도록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부를 쌓아 돌아온 마을

19세기 초, 미크로 호리오는 '폴리토코리아(Politochoria)', 즉 수많은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떠나던 그리스의 유서 깊은 마을들에 속해 있었다. 도시에서 일하며 재산을 모은 많은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안뜰과 아치, 넓은 현관을 갖춘 아름다운 석조 저택들을 지었는데, 불행히도 이 건물들 대부분은 1963년 산사태가 덮친 마을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스 혁명부터 세계대전까지, 역사의 현장에 서다

그리스 혁명 당시 많은 주민들이 전설적 지도자 마르코스 보차리스(Markos Botsaris) 휘하에서 케팔로브리소스(Kefalovrysos) 전투(1823년)에 참전했다. 전승에 따르면 보차리스는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아기오스 소스티스(Agios Sostis)로 이어지는 길목의 샘터 '브로모브리시(Vromovryssi)'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도 수많은 주민들이 전장에 나섰으며, 일부는 직접 전쟁 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들은 오늘날까지 마을의 역사·민속박물관에 소중히 보존되어 있다.

점령기의 비극, '미크로 호리 전투'

제2차 세계대전 점령기 동안 미크로 호리오는 국민저항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1942년 12월 18일, 저항세력 ELAS 부대와 이탈리아 연대 사이에서 유명한 '미크로 호리 전투'가 벌어졌고, 저항군은 이탈리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탈리아군은 마을의 집 여러 채를 불태우고 인질 13명을 처형했으며, 바스타키스(Dim. Vastakis) 신부와 카심바스(Har. Katsimbas) 신부 두 사람은 산 채로 불타 죽음을 맞았다.

저항의 목소리를 인쇄하던 마을

다음 해에는 독일군의 토벌 작전으로 저항 진영의 인쇄소가 카르페니시(Karpenissi)에서 인근 가브로스(Gavros) 마을로, 다시 미크로 호리오의 한 1층 가게로 옮겨졌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서류 양식과 함께 '루멜리(Roumeli)', '루멜리오티사(Roumeliotissa)' 같은 저항 신문이 찍혀 나왔고, '리조스파스티스(Rizospastis)'도 재인쇄되었다.

그러나 1944년 8월 독일군이 다시 침공해 마을에 남아 있던 집들을 모두 불태우면서 인쇄소는 크리켈로(Krikello)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마을은 한동안 버려진 채 방치되었지만, 시대가 바뀌며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섰다.

1963년, 마지막 타격과 '13'이라는 숫자

그러나 이 마을에 내려진 최후의 타격은 1963년에 닥쳤다. "비가 13일 동안 쉬지 않고 내렸습니다. 1963년 1월 13일 일요일, 오전 9시 13분에 산사태가 일어났고, 1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6세였던 목격자의 회고는, 많은 이들이 모르지만 아는 이들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기억하는 이 마을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날 크리(Kri) 산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암반이 마을의 집들을 덮쳤고, 마을의 상당 부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멀리서 산의 잘록하게 무너진 흉터를 바라보면, 사연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 비극과 추억이 저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모르는 이에게는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다.

숫자 13에 영원히 새겨진 마을

'작은 마을' 미크로 호리오는 긴 역사와 위대한 주민들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그리고 숫자 13은 전쟁의 상처와 자연의 재앙을 모두 겪은 이 마을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