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암살자, 브루투스는 누구였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모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젊은 시절의 브루투스는 어떤 분야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그를 깊이 아꼈던 카이사르를 향해 품은 끝없는 증오의 이유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정치 경력의 시작: 카토와 키프로스
브루투스의 정치 경력은 키프로스로 추방된 카토(Cato)를 따른 데서 출발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섬에서 브루투스는 부를 축적했고, 후견인이었던 카토의 딸 포르키아(Porcia)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로 구성된 삼두정치에 맞서 '옵티마테스'(원로원 귀족파) 진영에 섰습니다.
폼페이우스에 대한 미움은 납득되지만, 카이사르에 대한 증오는?
브루투스가 폼페이우스를 증오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오래전 배신적인 술라(Sulla)의 명에 따라 브루투스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카이사르에게까지 더 큰 적개심을 품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세르빌리아(Servilia)가 위대한 장군과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왔다는 사실에 질투했기 때문일까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카이사르의 친아들이라는 가설
일부 학자들은 브루투스가 실제로 카이사르의 친아들이었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 주장은 여러 사정상 확인도 배척도 불가능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로마의 장군은 브루투스를 친아들이든 아니든 항상 자식처럼 깊고 진심 어린 애정으로 대해왔다는 점입니다.
루비콘 강 이후: 배신과 관대한 용서
유명한 루비콘 강 도하 이후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 편에 섰지만,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루스(Pharsalus) 전투에서 내전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브루투스는 승자인 카이사르에게 고통스러운 사과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카이사르는 진정으로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브루투스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측근 그룹에 들이며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후에는 법무관(praetor)에까지 올렸습니다.
3월 15일의 비극, 그리고 필리피의 최후
그러나 이 모든 은혜조차 젊은이의 설명하기 어려운 원한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히려 증오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격렬하게 커져갔고, 결국 브루투스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른바 '이데스(Ides of March)'에 독재관의 목숨을 거둔 암살자들 무리에 합류하고 맙니다.
문제는 브루투스 역시 저명한 피해자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참패한 뒤, 그는 필리피(Philippi)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