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 12월 29일,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격렬히 대립하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이 네 명의 기사에게 참살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레지널드 피츄어스(Reginald fitzUrse), 휴 드 모르빌(Hugh de Morville), 윌리엄 드 트레이시(William de Tracy), 리처드 르 브르통(Richard le Breton)으로, 왕의 불만을 듣고 '소란스러운 사제를 없애줄 사람은 없는가'라는 한마디를 직접적인 계기로 삼아 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도주와 포위: 크네즈버러 성에서 항복까지
살인 직후 네 기사는 휴 드 모르빌의 소유였던 크네즈버러 성(Knaresborough Castle)으로 도피하여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곧 헨리 2세에 충성하는 군대가 성을 포위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기울었고, 며칠 만에 기사들은 항복하여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후 그들은 솔트우드 성(Saltwood Castle)으로 이감되어 일정 기간 수감되었으나, 보석 석방으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망명과 1174년의 사면
잉글랜드에 머물기 어려워진 기사들은 프랑스로 도피했고, 프랑스国王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으며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결국 1174년, 헨리 2세가 이들을 공식적으로 사면하면서 긴 추방 생활에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속죄의 조건: 성지 순례와 유배
사면에는 조건이 따랐습니다. 네 기사는 속죄의 의무로 성지(예루살렘) 순례를 떠나야 했고, 일정 기간 망명 생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기사단과 연관된 활동을 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말년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건의 여파
한편 희생자 토머스 베켓은 117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캔터베리 대성당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순례지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이 살인 사건은 왕권과 교권의 갈등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