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폭격, 왜 아직도 논쟁 중인가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몇 달 앞둔 시점에 영국 왕립공군(RAF)과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독일 작센주의 도시 드레스덴에 4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습니다. 이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고,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리던 아름다운 문화 도시가 하루아침에 파괴된 것입니다.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 폭격이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한 전략적 필요였는지, 아니면 민간인을 표적으로 한 전쟁 범죄였는지를 두고 찬반이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긍정론: 전쟁 조기 종결을 위한 필수 작전
드레스덴 폭격을 정당화하는 측은 당시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무력화해야 했다고 주장합니다. 드레스덴은 독일 동부의 철도 교통 요충지이자 산업 중심지로서, 동부 전선으로 향하는 병력과 물자의 핵심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도시의 철도 시설과 공장, 기반 시설을 파괴하면 독일군의 보급망에 치명타를 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연합군은 독일이 서부 전선의 병력을 동부로 재배치해 소련군의 진격을 막는 상황을 우려했고, 드레스덴 폭격이 소련을 지원하며 전쟁을 빨리 끝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설명합니다.
부정론: 민간인을 노린 무차별 폭력
반면 비판 측은 드레스덴이 군사적 가치가 크지 않은 문화 도시였으며, 폭격은 군사 목표물보다 민간인에게 집중된 무차별 폭력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당시 드레스덴에는 동부 전선에서 피난 온 난민들이 대거 몰려 있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특히 연이은 폭격으로 발생한 대형 화재폭풍(파이어스톰)은 거리 전체를 집어삼켰고, 여성과 노인, 아이들을 포함한 수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 전쟁 결과가 사실상 확정된 시점에 이루어진 폭격이라는 점 때문에 작전의 '필요성' 자체를 의심하는 시각도 적지 않습니다.
희생자 규모를 두고도 이견
드레스덴 폭격의 사망자 수 역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과거에는 최대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기도 했으나, 2010년 독일 역사학자 위원회의 공식 조사에서는 약 2만5천 명 선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숫자 논쟁과 별개로, 이 폭격이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남긴 상처와 트라우마는 결코 가볍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 남긴 질문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경험한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은 이 참상을 소설 『도살장 5호』에 담아냈고, 폭격의 황폐함을 생생하게 고발했습니다.
드레스덴 폭격을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쉽게 마무리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군사적 필요성과 인도주의 사이의 균형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묻는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전쟁 양측에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들의 생명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