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학살에 어떻게 대응했나? 알려진 오해와 실제 역사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은 1770년 3월 5일, 미국 보스턴에서 영국군 병사들이 시위 중이던 식민지 주민 다섯 명을 사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영국 의회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묻는 질문은 자주 제기되지만, 그 답변에는 몇 가지 흔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흔한 오해 바로잡기

일부에서는 “보스턴 학살 당시 영국 의회는 이미 미국 식민지의 통치 기구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1770년 당시 영국 의회는 여전히 13개 식민지를 통치하는 최고 권력 기관이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은 1775년이었고,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이 식민지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또한 미국 연방 정부가 수립된 것은 1789년 헌법 비준 이후의 일입니다.

영국 의회와 정부의 실제 대응

타운젠드 법의 부분 철폐

보스턴 학살 이전부터 식민지 주민들은 타운젠드 법(Townshend Acts)에 따른 관세에 불만을 품고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고, 1770년 4월 노스 경(Lord North)의 정부는 유리·페인트·종이 등에 부과된 관세를 대부분 철폐했습니다. 다만 차에 대한 관세는 의회가 식민지에 과세할 권한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유지되었고, 이는 훗날 보스턴 차 사건(1773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유화 정책과 ‘현명한 무활동’

1770년 총리가 된 노스 경은 식민지와의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소극적인 유화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현명한 무활동(masterly inactivity)’이라 불리며, 학살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강경 조치나 병사 처벌 요구는 의회 차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재판과 존 애덤스의 변호

학살에 가담한 토머스 프레스턴 대위와 병사 여덟 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을 변호한 사람은 훗날 미국의 초대 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John Adams)였습니다. 그는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병사들을 변호했고, 대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두 명만 과실치사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엄지손가락 낙인형에 처해졌습니다.

식민지 측의 선전 활용

한편 식민지 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반영(反英) 여론을 결집하는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폴 리비어(Paul Revere)가 제작한 판화는 ‘학살’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고,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등은 매년 기념 행사를 열며 독립 운동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결론

정리하면, 보스턴 학살이 일어난 1770년 영국 의회는 여전히 미국 식민지의 통치 기구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사건 이후 타운젠드 관세를 대부분 철폐하고 유화 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차 관세를 유지하면서 근본적인 갈등은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대응은 결국 1775년 독립 전쟁 발발로 이어지는 긴 항로의 한 단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