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토지 제도는 천황 중심의 통치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축이었으며, 국가 재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토지 제도는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법률의 발전 등 다양한 요소가 함께 얽혀 있습니다.
고대의 조세는 주로 쌀 같은 곡물로 납부되었습니다.
세금이 안정적으로 걷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고대든 현대든 국가 재정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조세를 효율적으로 거두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토지 제도 개편이 이루어졌습니다.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의 시작
공지공민제는 대화개신(大化の改新) 이후 반포된 개신의 조서(改新の詔)를 통해 통치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유력 호족들이 자신들의 땅과 백성을 사유하는 '사지사민(私地私民)' 제도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지사민에서 공지공민으로 전환된 배경에는 630년 당(唐)의 건국이 있습니다.
이미 강대했던 수(隋)를 대신해 더욱 강력해진 당나라가 등장하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크게 변동했습니다. 이에 나카노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는 일본 역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을사의 변(乙巳の変)과 대화개신 등 정치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새로운 토지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개신의 조서에는 첫째로 천황과 유력 호족의 사유지·사민 폐지가 명시되었고, 셋째로 호적과 계장(計帳)을 작성해 새로운 조세 징수 방식을 마련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통일적 조세 제도인 조용조(租庸調)가 확립되었고, 백성에게 논을 분급하는 구치분다(口分田)를 골자로 하는 반전수수(班田収授) 제도, 즉 공지공민제가 성립했습니다.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
인두세 성격이 강한 조용조 부담에 시달린 백성들은 하나둘 도망쳤고, 조세 징수 기준이 되는 구치분다는 황폐해졌으며, 결국 세금을 낼 구치분다 자체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상황을 파악한 나가야 왕(長屋王)은 722년 구치분다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만정보 개간 계획(百万町歩開墾計画)을 세워 경작 가능한 토지를 넓히려 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723년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이 반포됩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개간한 땅의 사적 소유를 일정 기간 허용한다.
- 새로운 관개 시설을 갖추며 개발한 경우: 3대에 걸쳐 소유할 수 있다.
- 기존 관개 시설을 활용해 경작한 경우: 1대에 한해서만 소유할 수 있다.
즉, 개간하여 조세를 낼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손자 대까지 토지 소유를 인정했고, 이미 관개 기능을 갖춘 땅이 백성의 도망 등으로 방치되었다가 다시 개간·경작된 경우에는 한 세대에 한해 한시적으로 소유를 허용했습니다.
이 정책으로 민간 주도의 새 논 개발을 촉진하려 했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고 소유 기한이 끝난 뒤에는 구치분다가 다시 황폐해져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
삼세일신법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에, 추가적인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743년의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입니다.
사료를 확인하면 핵심 내용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 개간한 땅을 영구적인 사유재산으로 보장한다.
- 신분(위계)에 따라 개간할 수 있는 면적에 상한을 둔다.
이 제도는 귀족, 대사원, 지방 호족을 개간의 주체로 전제하고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765년 한때 금지되었으나, 772년 이후 다시 영구 사유가 인정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지공민제는 붕괴하게 됩니다.
간전영년사재법에 따라 귀족, 대사원, 지방 호족이 개간과 매입을 통해 확보한 별장(別業)을 초기 장원(初期荘園)이라고 부릅니다.
형식상으로는 소유한 토지의 일부를 빌려주고 사용료를 걷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러한 장원은 귀족, 대사원, 지방 호족이 경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