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 천황의 두 가지 대표 사업은 나가오카쿄와 헤이안쿄로의 천도, 그리고 도고쿠(동북 지방)의 경영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중 도고쿠 경영, 즉 '도고쿠 평정'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겠습니다.
도고쿠 지방의 역사
먼저 당시 동북 지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도고쿠 지방은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속조몬 시대'라 불리는 시대에 머물러 있었으며, 야마토 정권과 일본 열도 서부의 흐름과는 별개의 문화를 이어갔습니다.
다이카 개신이 단행되면서 동북 지방에는 '도오쿠니(道奥国)'라는 국명이 설치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것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대부분의 지역이 조정의 지배 밖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조정은 '성책(城柵)'이라 불리는 방위 거점 축조를 시작합니다.
도고쿠 정복
조정이 도고쿠 정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사이메이 천황 대부터였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수·당의 힘으로 통일 국가가 성립하면서 한반도와의 관계도 미묘한 국면을 맞게 됩니다.
아베노 히라후는 국내 안정을 위해 도고쿠로 향했고, 에조와 에조에 적대하는 세력 간의 분쟁에 개입하며 포상과 응징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여러 세력을 조정에 귀속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개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도고쿠는 다른 지역보다 냉해의 피해에 훨씬 취약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벼농사가 전해진 뒤에도 수렵·채집 중심의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농경에 의존하면 흉년마다 굶주림이 반복될 위험이 컸던 것입니다. 다만 나라 시대는 온난화가 진행되던 시기였기에 에도 시대만큼 기근이 잦지는 않았습니다.
도고쿠 기근의 연혁
713년~800년 구간을 보면 흉작과 기근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 이후 기근 빈도가 줄어든 것은 중세 온난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와 겹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앞서 나라 시대에 승려 수가 늘어난 배경과 감진(간진)의 내일(來日) 이유를 다룬 글에서, 735년 천연두 유행의 원인 중 하나로 기온 변화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무렵부터 온난화가 시작되긴 하지만 아직은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귀순 에조의 반란
반란의 또 다른 원인은 귀순한 에조를 포수(俘囚)로 삼아 간토 이서 여러 지역에 강제 이주시켜 개간하게 한 정책에 있었습니다. 포수에 대한 혹독한 대우가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원래 포수나 기근 때문에 한 번 귀순했던 에조의 대호족 고레하리노 아자마로가 780년에 봉기하면서, 도고쿠의 군사 요충지였던 다가성(多賀城)마저 함락되는 등 반란은 대규모로 번져나갔습니다.
이 사태가 30년이 넘게 이어지자 간무 천황은 기노 고사미를 정동대장군으로 임명해 대군을 파견하지만 패배하고 맙니다. 그 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장군이 되어 이사와성(胆沢城)을 축조했고, 에조 측의 핵심 인물 아테루이(阿弖流為)를 귀순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 덧붙임(2015년 10월 30일)
이지의 난 자체는 1년 만에 진정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도고쿠는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고 770년 무렵부터는 소위 '38년 전쟁'이라 불릴 만한 소요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조정의 지배권은 동해 쪽으로는 요네시로강 유역까지, 태평양 쪽으로는 기타카미강 상류에 시와성(志波城)을 축조하는 곳까지 확장됩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지만, 헤이안쿄 천도라는 또 하나의 대사업과 병행하다 보니 재정적인 부담이 컸고, 결국 양대 사업은 중단됩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지배 아래 둔 것은 간무 천황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