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고대 일본 율령 국가의 교통 시스템: 역마와 역로 제도의 모든 것

율령 국가와 도로 정비

오늘의 주제는 '율령 국가와 도로 정비'입니다.

아스카 시대 후반,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모습이 갖춰지면서 관리들의 서열 차이도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지금 '법률'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것이 탄생했습니다. 바로 701년의 대보율령(大寶律令)입니다. 율(律)은 오늘날의 형법에 해당하고, 령(令)은 행정법·민법에 해당합니다. 또한 령에는 행정 조직의 직무 규정과 운영 방침뿐 아니라 백성에게 부과되는 조세까지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법령 정비의 흐름 속에서 비상 연락 체계인 역참 제도(驛站制度)가 등장합니다. 이 제도 자체는 다이카 개신 무렵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대규모 정비는 율령의 정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역마란 무엇인가?

먼저 역마(驛馬)가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령슈카이(令集解)'와 '연희식(延喜式)'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도카이(東海)·도산(東山)·호쿠리쿠(北陸)·산인(山陰)·산요(山陽)·난카이(南海)·사이카이(西海)의 7개 역로(驛路)가 개설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역로란 역마를 이용하기로 정해진 길을 말합니다.

이 역로를 따라서는 역로를 이용하는 공식 사자(역사(驛使))를 위한 숙박·휴식 공간이자, 역 사용자의 이동 수단인 역마를 사육하는 시설인 역가(駅家)가 배치되었습니다.

역마는 필요할 때마다 빌려 쓰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마 제도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는 오늘날의 경찰차와 같은 비상용 수단과 같은 역할을 했지만, 8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역할이 점차 확대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가에 관한 규정

역가에 관한 규정은 율령의 '역가조(駅家条)'에 매우 상세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역가를 설치하는 간격', '역가에는 부유하고 실무 능력이 뛰어난 자 한 명을 역장(駅長)으로 삼는다', '역로의 등급에 따라 사육해야 할 마필 수를 정한다'는 내용 외에도 말 구입 방법, 말이 병들었을 때의 처리 방식, 공식 사자 응대 방법 등 여러 사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역장에게 '부유하고 실무 능력 있는' 인재가 필요했던 이유는, 초기에는 국가가 논을 지급했지만 이후 운영비는 그 논의 투자 수익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논에서 거둔 쌀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를 운영 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물론 한 집안이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가 인근의 농민들이 경작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을 역자(駅子)라고 부릅니다.

말을 관리하던 역자

비상시 이동 수단으로 튼튼한 말이 필요했는데, 그 말의 관리 역시 역자가 담당했습니다. 말의 건강 상태만 관리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들었고, 8세기 무렵부터 역마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역자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도망치는 상황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원래 율령제 자체가 당나라에서 도입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풍토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율령의 적용 범위가 확대될수록 역마 제도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역로의 개편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였을까요?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역로는 개편됩니다. 폐지되거나 축소된 역로도 있었고, 새롭게 재정비된 곳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역로의 규모 자체는 점차 줄어들었고, 그 결과 10세기 중반에는 전국의 역로가 폐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율령제의 붕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8세기 말경부터 이미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0세기에는 율령제의 최후 형태라 할 수 있는 '연희식'이 편찬됩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율령제의 실체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으며, 명목상으로만 존속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8세기를 그 종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역마 제도는 점점 부담이 되어갔고, 중앙집권 시대에서 지방 분권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역로는 지방의 도로망 속으로 묻혀간다고 합니다.

길 자체는 산나이 마루야마 유적에서 확인되듯 조몬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역 내부의 이동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역로처럼 국가의 의지가 개입된 대규모 도로망인 역참 제도는 아마도 이것이 처음일 것입니다(다이카 개신 무렵에도 도로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역로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은 농민

역로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은 조세를 납부하러 가던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그때까지 지방 바깥의 세상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겁니다. 논을 지급받은 자들은 땅을 떠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도읍에 조세를 납부하러 간 사람들 중 상당수가 홀린 듯 그대로 도망쳤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자에게 면세 혜택이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면세가 있었다 하더라도 역자의 노동 자체가 큰 부담이었고, 조세를 납부하러 오던 지방 농민들을 통해 도읍의 상황과 지방에서 도망자가 늘어나는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은 역자가 도망칠 충분한 동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역마 제도가 율령제 붕괴를 앞당긴 요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역로는 비상 연락 체계를 위한 길이었기 때문에 지방 통치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장의 제도 자체를 흔드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역로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1300년 전에 만들어진 국도를 바라보며 그 긴 역사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이 훗날 철도의 발달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감회가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