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공백의 4세기, 고대 일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2018년 11월 27일, 일본 나라현(奈良県)의 이치오미야츠카 고분 주변 유적에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축물 '대벽(大壁) 건물'이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도래인(渡來人), 즉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축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걸친 시기라 하면, 일본사에서 이른바 '공백의 4세기'로 불리는 시대입니다. 당초에는 야마토 왕권 5왕 중 한 명인 유랴쿠 천황(5세기 후반 재위) 대 이후에 도래인들이 정착한 것으로 보았지만, 이번 발견으로 정착 시기가 한참 앞당겨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백의 4세기'의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가 될 듯한 발견이 있었던 만큼, 이번 글에서는 그 시기를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공백의 4세기 이후, 일본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고대 일본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중국의 역사서입니다. 3세기 중반 히미코(卑弥呼)와 그 후계자 이요(壱与)의 조공 기록 이후, 413년 왜왕 '찬(讃)'의 조공 기록을 끝으로 중국 사서 속 왜국(倭国)은 오랫동안 모습을 감춥니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는 어디를 파더라도 절대 발굴이 허용되지 않는 천황릉(陵墓), 곧 인덕 천황(仁徳天皇) 등의 고분(古墳)이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입니다. 황실의 비밀에 닿을 수 있는 장소이기에 발굴조차 불가능하므로, 4세기 무렵 일본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내막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정사(正史)에 나타난 고대 일본의 모습은 신화와 전설이 뒤섞여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다만 이 공백기를 사이에 두고 뚜렷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무덤은 단순히 흙을 쌓아 올린 형태에서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같은 복잡한 구조로 바뀌었고, 야요이 시대 의례용구의 대명사였던 동탁(銅鐸)은 자취를 감췄으며, 금속기의 주류였던 청동기는 철기로 대체되었습니다.

인종적인 특징도 달라졌습니다. 조몬인(縄文人)에 가까웠던 깊은 이목구비의 체형은 얕은 이목구비의 대륙형 체형으로 바뀌었고, 그때까지 해오던 문신(入墨) 습관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라졌습니다.

특히 4세기 후반부터는 역사적 변화가 더욱 현저해집니다. 100m를 넘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축조의 중심이 되고, 분묘에는 벽화가 그려집니다. 부장품도 종래의 검·거울·옥 중심에서 벗어나 마구(馬具)와 관(冠) 등 한반도 및 대륙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야마타이국에는 말과 소가 없었다?

히미코 시대의 중국 측 기록인 『위지 왜인전(魏志倭人傳)』에는 "왜의 여러 나라는 물론 야마타이국에도 말과 소가 없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3세기 말 야마타이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뒤, 일본에서는 마구와 말뼈(馬骨)가 대량으로 출토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말이 대륙에서 건너왔다는 정황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말이 저절로 바다를 건너왔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든 말을 데리고 온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 한반도에서 몇 마리의 말, 몇 명의 사람이 건너왔는가?
  • 소규모 집단이 단계적으로 도래했는가?
  • 거대한 기마 집단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는가?

이 시기의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면 말과 도래인의 유입 경위를 알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중국 사서는 왜국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야마타이국의 소멸이라는 큰 사건과 야마토 정권의 성립이라는 또 하나의 큰 사건 사이에 낀 4세기 무렵의 일본열도는 실체를 모른 채 오늘에 이르렀고, 야마타이국 위치 논쟁을 비롯한 여러 학설이 난립하며 '수수께끼의 4세기', '공백의 4세기'라고 불립니다.

커다란 변화가 있었고, 무엇보다 무기와 마구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실로 미루어 이 무렵 상당한 규모의 격돌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을 살펴보면, 고구려와의 대외 전쟁의 영향일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 – 위키백과 인용

일본 측의 견해이긴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웠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했다'는 서술을 고려하면, 이 시점에서 이미 일본은 어느 정도의 조직력을 갖춘 국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기와 마구는 왜 일본으로 들어왔을까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무기와 마구가 출토되었을까요? 중국 사서는 야마타이 시대의 왜국에 말이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내분 속에서 국가를 통합하는 데 무기와 말이 필요했다면 확실히 강력한 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는 어느 나라든 스스로 만들 수 있어도 말은 일본 열도 어디에도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준비하려면 외부의 도움이 불가피했습니다.

실제로 이에 대한 해답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3세기 무렵,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서는 한랭화(寒冷化)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먹이를 찾아 민족 이동이 활발해졌고(이는 로마 제국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국 대륙 역시 혼란의 시대에 접어듭니다. 일본 역시 히미코 사후 '왜국대란(倭国大乱)'이라 불리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구려 역시 남하를 시작합니다.

* 3세기 지도이므로 원삼국(原三國) 시대입니다. 이후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로 국가화됩니다.

고구려는 강력한 기마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몽골과도 가까워 말이 풍부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이에 따른 각국의 행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백제·가야 → 왜국에 협력을 요청
  • 신라 → 고구려 쪽으로 기울었다

강력한 기마 군단과 맞서려면 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연유에서 말과 마구, 무기를 왜국에 가져왔을 것이라는 이론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도래인의 정착 흔적이 확인된 사실은, 야마토 정권 성립 전후에 벌어졌던 사건들을 밝히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