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白河) 천황, 도바(鳥羽) 천황, 고시라카와(後白河) 천황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인세이(院政)는 100년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인세이는 다이라(平)씨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다이라씨가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그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사무라이가 크게 중용되게 된 배경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지방의 혼란과 사무라이의 대두
헤이안 시대에는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정치가 혼란해지며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주요 사건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 939년 — 간토 지방의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의 난과 세토 내해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난
→ 조정은 자체 군사력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지방 무사의 힘을 빌려야 했으며, 이를 통해 조정 군사력의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 1019년 — 여진족 해적의 침입인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규슈)
→ 규슈의 사무라이들이 이를 격퇴했습니다.
이러한 지방의 소동을 통해 무사들의 실력을 확인한 귀족들은, 청량전(清凉殿)을 경비하는 타키구치노 무샤(滝口武者)는 물론 궁중 호위와 도성 경비에 이르기까지 무사를 자신의 경호원으로 고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1028년 — 가즈사(上総) 지방의 다이라노 다다츠네(平忠常)의 난
→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頼信)가 이 난을 평정했습니다.
→ 이것이 겐지가 동국(동일본)에 진출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 1051~1062년 — 무츠 지방의 전구년 전쟁(前九年合戦)
→ 국사(国司)와 무츠의 호족 아베(安倍)씨 사이의 분쟁이었습니다.
→ 요리노부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와 손자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가 데와(出羽)의 기요하라(清原)씨의 도움을 받아 동국 무사들을 이끌고 아베씨를 멸망시켰습니다.
- 1083~1087년 — 무츠·데와 지방의 후구년 전쟁(後三年合戦)
→ 기요하라씨의 내분이었으며, 요시이에가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清衡)를 도와 이를 해결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을 거치면서 세이와 겐지는 동국 무사단의 맹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정은 이러한 기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겐지에 대한 장원 기진(寄進)을 금지했고, 요시이에 사후에는 내분까지 겹치면서 한동안 겐지의 세력은 쇠퇴하고 만니다.
승병의 등장
- 8~9세기경
초기 장원(初期荘園)이 발달했습니다. 귀족들은 직접 개간한 토지에 더해 매입과 기진으로 영지를 계속 늘려갔지만, 점차 노동력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쇠퇴하게 됩니다.
- 10세기경
대사찰이 부전불수권(不輸不入権), 즉 조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관리의 현지 검사를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획득했습니다.
- 11세기경~
이러한 특권을 누리기 위해 유력자에게 토지를 바치는 기진형 장원(寄進地系荘園)이 급증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 정치 부패와 9세기의 잦은 재난 등이 겹치면서 치안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약탈의 표적은 당연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이었고, 사찰과 신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찰과 신사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헤이안 말기로 갈수록 승병(僧兵)은 강력한 무장 집단으로 성장했고, 그 무력을 배경으로 사원 간의 항쟁을 벌이거나, "불벌(佛罰)과 신벌(神罰)을 내릴 것이다"라고 위협하는 것에 가까운 고소(強訴)를 조정이나 섭관가에 대해 감행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밀어붙였습니다.
사실상 제멋대로 군림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조정 안에서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던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조차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 가지" 중 하나로 히에이산 엔랴쿠지(比叡山延暦寺)의 승병을 꼽았다고 전해집니다. 나머지 둘은 가모가와 강의 물과 주사위 놀이였습니다.
실제로 인세이 시기에만 고소가 60여 회나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승병의 무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고승이 처벌을 받으면 실제로 처벌이 내려졌을 때 주변에 미치는 파장 또한 헤아릴 수 없이 컸던 것입니다.
정리: 사무라이 중용의 배경
이처럼 사무라이가 대거 중용된 것은, 사찰과 신사가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헤이안 말기 이후 중세 일본의 군사력을 떠받치는 두 개의 큰 축은 사무라이와 승병이었는데, 조정은 그중 사무라이를 활용해 승병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사무라이는 신벌이나 불벌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를 억누르는 데에는 사무라이를 기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시라카와 법황 역시 법황 자신의 호위와 참배 행렬을 위해 무사들로 구성된 호위 집단을 조직했습니다. 천황 어소의 북쪽이 이들의 대기 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이들은 호쿠멘노 부시(北面の武士, 북면의 무사)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겐지·헤이케 출신 무사들을 측근으로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무라이는 크게 중용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