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토이의 입구(刀伊入寇)란? – 1019년 여진족의 규슈 침공과 그 배경

10세기에 일어난 조헤이·덴교의 난 외에도, 무사 계급이 점차 성장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1019년에 발생한 토이의 입구(刀伊の入寇)입니다.

당시 다자이노 곤노소츠(大宰権帥)였던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의 지휘 아래 규슈의 무사들이 이들을 격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번 글에서는 토이의 입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토이란 무엇인가?

토이(刀伊)는 주로 고려 사람들이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키던 명칭입니다. 이 단어가 그대로 일본에서도 사용되게 되었고, 1019년 토이 즉 여진족들이 쓰시마·이키·기타큐슈를 침공하면서 이 사건이 토이의 입구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진족은 이 시기 현재 중국 동북부(만주) 지방에 위치한 요(遼)나라에 속해 있었습니다. 숲이 울창해 목축에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지만, 여진족은 농경과 수렵, 어업 등을 병행하며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평시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습니다.

요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요(遼)는 거란족(契丹族) 야율씨(耶律氏)가 세운 나라로, 만주 일대를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당나라가 혼란에 빠지던 907년, 중국 동북부의 몽골계 유목 부족들(=거란)을 이루던 8개 부족이 통일되었습니다. 이들은 916년 몽골 고원으로 진출해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며, 주변의 여진족이나 돌궐 등의 민족까지 복속시켰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926년에는 당시 일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발해를 멸망시켰고, 이후 동쪽으로는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 이후 발해는 몇 차례 부흥과 멸망을 반복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흥한 발해가 최종적으로 멸망한 시기는 1018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력 확장을 추진하던 요였지만, 항상 순풍만 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 영역 내에는 연운16주(燕雲十六州)라 불리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현재 베이징이 위치한 허베이성 북부에서 산시성에 걸쳐, 만리장성 남쪽에 펼쳐진 땅입니다. 이 일대는 양질의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했습니다. 석탄이 근대에 들어서야 쓰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지만, 중국 제철 기술의 역사를 보면 11세기에 이미 석탄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연운16주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모두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요는 이 땅을 장악했고, 이는 훗날 금·원 등 이민족 정복 왕조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유목민을 막기 위해 쌓은 장벽 안쪽, 곧 만리장성 이남을 지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된 셈입니다.

…다소 화제가 벗어났지만, 아무튼 요충지를 손에 넣은 요. 960년 오대십국의 혼란을 종식시키며 북송이 건국되자, 송은 두 차례 요를 공격했지만 요는 이를 모두 격퇴합니다.

그러나 이 무렵 요에서는 황제의 후계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난 듯합니다. 중국 문화를 적극 수용하려는 파벌과 거란 고유의 문화를 지키려는 파벌이 대립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북송을 몰아붙일 여유가 사라졌고, 양국 사이에는 소강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정 상황 속에서 요가 송을 공격한 것이 1004년의 일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요와 북송 사이에는 단연의 맹(澶淵之盟)이라 불리는 협약이 체결됩니다.

  • 국경의 현상 유지
  • 송이 매년 막대한 비단과 은을 요에 지급
  • 송은 '형', 요는 '아우'의 지위를 가짐

이러한 협정의 결과로 요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제력을 갖춘 요는 1010년부터 고려를 자주 공격하게 됩니다.

토이의 입구가 일어난 1019년, 그 전해인 1018년에도 고려는 요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여진족은 중국 동북부에 살았기 때문에,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해적 행위가 부추겨졌고, 그것이 쓰시마와 규슈 공격으로 이어졌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고려·여진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926년 발해가 요에 의해 멸망하면서 요와 고려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원래 발해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양측이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발해가 멸망하자 고려 측이 발해 태자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 발해는 원래 말갈족(靺鞨族)이 세운 나라로, 이 말갈족은 여진족의 선조로 여겨집니다. 인접 국가들과 교역을 하던 발해는 멸망 이후에도 몇 차례의 부흥과 후계 국가의 성립을 거치며 무역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물론 나라가 사라지면 교역로가 끊기고 생계도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계기로 여진족의 고려에 대한 해적 행위가 점차 활발해졌다고 보입니다.

한편 960년 송이 건국됩니다. 고려가 북송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자 요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요는 고려를 공격합니다.

그 결과 고려는 조공 바치기, 송과의 단교 등을 조건으로 강동6주(江東六州)(현재 북한 서북부)를 확보하게 되는데, 이 강동6주에는 여진족도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요에 조공을 바치며 한동안 평온을 누렸지만, 고려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요는 이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1009년 고려를 침공합니다. 이후에도 침입은 잦았고, 1018년과 1019년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최전선에 서 있던 여진족이 고려와 요의 전쟁에 깊이 휘말렸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본래부터 해적 행위의 토대가 있던 상황에서, 양국의 혼란이 겹치며 토이의 입구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