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전국) 시대의 전투 이야기라고 하면 웅장하고 용맹한 장면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끄는 대군을 오다 노부나가가 소수의 병력으로 격파했고,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철포 부대가 다케다 가문의 자랑이던 기마 군단을 궤멸시켰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병력이 동원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병사를 움직이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병력 산출의 기본 공식, '1만 석 = 250명'
일반적으로 센고쿠 다이묘의 동원 가능 병력은 '1만 석(石) = 250명'이라는 공식으로 추산됩니다. 이는 도요토미 정권이 가정했던 군역(軍役) 기준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이 수치를 바탕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이 기준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우에스기 겐신처럼 유력한 다이묘를 대상으로 설정된 것이므로, 모든 다이묘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요 다이묘의 석고와 최대 동원 병력
그렇다면 누구나 아는 유력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추정 석고(石高)와 최대 동원 병력을 살펴보겠습니다.
- 오다 노부나가: 약 700만 석 → 약 17만 5,000명
- 도요토미 히데요시: 약 700만 석 → 약 17만 5,000명
- 도쿠가와 이에야스: 약 400만 석 → 약 10만 명
- 다케다 신겐: 약 130만 석 → 약 3만 2,500명
- 우에스기 겐신: 약 145만 석 → 약 3만 6,250명
- 호조 우지야스: 약 150만 석 → 약 3만 7,500명
- 모리 모토나리: 약 130만 석 → 약 3만 2,500명
- 시마즈 요시히사: 약 150만 석 → 약 3만 7,500명
숫자 이상의 힘, 오다 노부나가의 경제 기반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추정 석고가 약 700만 석, 동원 병력은 약 17만 5,000명으로 계산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낙시낙좌(樂市樂座)와 같은 자유경제 정책 덕분에 영지로 유입되는 자금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국경 지대 거상(巨商)들과의 긴밀한 관계 역시 군자금 확보에 큰 몫을 했습니다.
반면 당시 오다 가문과 맞서 싸우던 우에스기 가문과 다케다 가문은 석고 자체는 일정 수준에 달했지만, 현금 수입과 유통이라는 중요한 경제 기반에서는 오다 가문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병력 동원에 숨어 있는 비용
병력을 동원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요구합니다. 기본적인 무사와 아시가루(足軽)뿐만 아니라 기병, 철포 부대, 보급 부대, 깃발 담당 인원까지 모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영지가 넓을수록 출진 후 남겨진 영지를 지키는 병력도 따로 배치해야 하므로 부담은 더욱 커집니다.
결국 재정력이 밀리면 병력은 갈수록 부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전장에서 낭인(浪人)이나 용병을 즉석에서 고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히 비용이 더욱 늘어났습니다.
결국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돈'
따라서 막대한 군자금을 조달하고 자금을 빠르게 회전시킬 수 있는 경제 기반과 민첩성을 갖춘 다이묘일수록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서 착실히 세력을 불려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 사후 단연코 가장 많은 병력과 강력한 재정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목록에서는 석고가 같으면 동원 병력도 같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병력은 개별 다이묘의 재정력에 따라 크게 달라졌습니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는 돈이 목소리를 내는 법,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