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전투가 등장하며, 두 군대가 생사를 건 치열한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의 전투는 의외로 깔끔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방법이란 바로 일기토(一騎討ち, 단독 대결)입니다.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 일기토가 기본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들은 기마 무사(騎馬武者)였습니다. 무사 곁에는 나기나타(長刀)를 든 아시가루 종자가 따랐으며, 전투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기병 무사였고 종자들은 보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투는 시아와세(矢合わせ, 화살 맞대결)로 시작됩니다. 특히 '카부라야(鏑矢)'라 불리는, 울음소리를 내는 화살을 쏘아 전쟁의 개시를 알렸습니다.
이후 무사들은 적진에서 마땅한 상대를 물색해 서로 이름을 밝히고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말을 달리며 활로 상대를 쏘는 이 방식은 마치 류바사메(流鏑馬, 유엽마)과 흡사했습니다. 다만 당시 갑옷은 무게가 30~40kg에 달해 화살이 좀처럼 관통하지 못했고, 결국 많은 경우 서로 화살을 다 소진하는 것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검을 이용한 일대일 백병전으로 이어지지만, 이 역시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상대를 말에서 끌어내려 눕힌 뒤 찌르는 방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편 아시가루 보병들은 주인이 패배 직전에 몰릴 때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전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헤이안~가마쿠라 시대 무사들의 전투는 활과 말을 이용한 원거리 공방으로 시작해,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프로레슬링과 같은 일대일 대결로 이어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 일기토를 정착시켰다
이러한 전투 방식은 당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상대는 익숙한 얼굴이거나, 설령 모르는 사이라 해도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었습니다. 같은 사회에 속한 일본인끼리의 싸움이었기에, 적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가 마주했던 것처럼 생소한 이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즉, 일본에서는 전투 방식 자체가 승자와 패자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배의 노 젓는 사람을 공격한 일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비난받았습니다. 이는 이 시대의 전투가 단순한 승패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무사는 전투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관료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지만,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들은 토지를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사이면서 동시에 농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기토 정신이 같은 사회를 공유하는 집단 사이에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 바로 몽골 침입(원나라의 일본 원정)입니다. 몽골 침입 당시 가마쿠라 무사들의 일기토 정신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크게 고전했습니다. 결국 가마쿠라 무사들 역시 집단 전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몽골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일기토 정신은 무로마치 시대까지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며 전쟁 규모가 점차 커지고 참전 병사 수가 급증하면서, 활과 화살 같은 투사 무기를 중심으로 한 원거리 전투가 여전히 주류였음에도 점차 집단 전투와 보행 전투가 늘어났습니다. 무기 또한 집단 전투에 적합하도록 나기나타에서 창(槍)으로 변화했으며, 전국시대 집단전의 주력은 아시가루가 되었습니다.
헤이안~가마쿠라 시대 전투의 기본이었던 일기토는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무사의 모습과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충분히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로마치 시대 이후 전투 규모가 커지고 병사 수가 늘어나면서 일기토 정신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의 전투 및 군사 제도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