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노부나가 포위망 ③] 반(反)노부나가 세력의 마지막 저항, 1575~1582년

아사쿠라·아사이 세력은 오랜 세월 노부나가를 괴롭혔으나 결국 멸망했고,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노부나가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다케다 신겐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가쓰요리가 가문을 계승했지만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참패하면서 다케다 가문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구 다케다 영지마저 오다 씨의 영토로 편입되어가니, 노부나가에게는 더 이상 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이시야마 혼간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

혼간지는 제8대 법주 렌뇨 시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호쿠리쿠 지방으로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특히 가가국에서는 문도(門徒)들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며 전국 다이묘의 세력을 배제하는 독특한 질서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가가·에치젠·오미 등 호쿠리쿠 지방에서 올라오는 연공(年貢)이 오사카 본산으로 끊임없이 운반되었습니다.

이러한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제11대 법주 겐뇨(顯如)는 초창기부터 노부나가 타도를 주장해 왔습니다. 1575년 무렵, 기나이의 유력 다이묘들이 차례로 무너진 상황에서도 혼간지가 오랫동안 노부나가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호쿠리쿠의 잇코 잇키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치젠국은 원래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영지였습니다. 요시카게를 멸망시킨 노부나가는 그 영지를 아사쿠라 가문의 옛 신하들에게 맡겼지만, 옛 신하들은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다 틈을 파고든 혼간지 세력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호쿠리쿠 잇코 잇키

혼간지가 오랫동안 노부나가에 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호쿠리쿠에서 올라오는 연공이었습니다. 따라서 노부나가 입장에서는 이 연공을 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앞서 말했듯 에치젠국은 혼간지가 잇코 잇키를 동원해 장악했지만, 모든 문도가 혼간지를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불만이 누적되면서 오사카에서 파견된 승려들과의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을 놓치지 않은 노부나가는 1575년 에치젠으로 진군합니다. 잇코 잇키는 방어태세를 강화했지만, 본가인 혼간지와의 내분으로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큰 저항 없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가가에서 올라오던 연공이 끊기게 되고, 곤경에 빠진 혼간지는 노부나가와 화친을 맺습니다.

모리 씨와 혼간지의 동맹

아키국을 근거지로 하는 모리 씨는 모리 모토나리 시대에 강대해졌고, 손자 데루모토의 시대에는 빙고에서 빈젠·미마스카 방면으로 동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모리 씨는 노부나가와 공개적으로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오는 노부나가와의 충돌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모리 데루모토는 실각한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혼간지와 손잡고 노부나가와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이 동맹을 통해 혼간지는 모리 씨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1576년 노부나가와의 화약을 깨고 재차 항전에 나섰습니다.

노부나가는 오사카를 포위하고 공격을 이어갔지만, 모리 수군이 혼간지로 원군과 물자를 실어 나르면서 봉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제1차 기즈가와구치 전투). 이후에도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포위했지만 항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모리 씨 외에도 기이의 사이카 잇키 역시 혼간지에 군세를 계속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에 노부나가는 보급로를 끊기 위해 기이로 출병합니다. 사이카 잇키가 항복을 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화친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었고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같은 해 7월, 우에스기 겐신이 혼간지와 통하면서 노토 평정을 발판 삼아 가가로 침입합니다. 노부나가는 가가의 데도리강에서 우에스기군을 맞이했으나 패배하고 말았습니다(데도리가와 전투).

노부나가의 패전 소식을 접한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우에스기군의 추격이 없음을 확인한 노부나가는 히사히데의 거성 시기산성을 공격합니다. 이때 노부나가는 명품 다관 '평거미(平蜘蛛)'를 넘겨주면 목숨을 용서해주겠다는 항복 권고를 보냈지만, 히사히데는 이를 거부하고 다관에 화약을 채워 폭파시키며 자결했습니다.

그 후 우에스기 겐신이 사망하고 가게카쓰가 가문을 이었지만, 우에스기 씨의 적대 관계는 혼노지의 변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노부나가와의 결별, 그리고 포위망의 종언

이 무렵부터 노부나가 주변에서는 이반(離反)이 잇달아 일어납니다. 1578년 3월에는 하리마국 미키성의 벳쇼 나가하루가, 같은 해 7월에는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켜 모리·혼간지와 연결됩니다.

두 사람의 반란에 더해 모리 씨의 맹공격으로 고전하던 노부나가는 한때 혼간지와의 강화를 생각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제2차 기즈가와구치 전투에서 대형 안택선을 앞세운 오다 수군이 모리 수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잡은 노부나가는 반격으로 전환, 1579년 아라키 무라시게를, 1580년 벳쇼 나가하루를 차례로 무너뜨립니다.

벳쇼 나가하루를 함락한 같은 해 3월, 제3차 노부나가 포위망의 중심이었던 혼간지가 조정의 중재를 받아들여 노부나가와 강화에 응합니다. 강화 조건은 겐뇨가 오사카를 떠나는 것으로, 사실상 노부나가의 항복 권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혼간지의 항복으로 제1차부터 제3차까지 이어져 온 긴 노부나가 포위망은 드디어 소멸하게 됩니다.

기나이의 지배를 굳건히 다진 노부나가는 주고쿠 지방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호쿠리쿠의 우에스기 방면에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간토의 호조 방면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파견해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1582년 히데요시의 원군을 위해 주고쿠로 향하던 도중,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포위망 기간 노부나가의 최대 위기는 역시 1572년 10월, 다케다 신겐이 상경을 위해 서상(西上)을 개시했을 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신겐이 병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다케다군의 침공은 서미카와까지 이어졌을 것이고, 노부나가는 다케다 씨와의 결전을 위해 주력을 동쪽에 집중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노부나가의 편이었습니다. 신겐의 병환과 다케다군의 철수로 동쪽의 압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덕분에 노부나가는 서쪽 평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