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는 상품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특권 계급인 무사(사무라이)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도 커져서, 막부의 지출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100년 동안 거의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반면 막부의 수입은 신전 개발을 추진한다고 해도 극적으로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막부는 화폐 개주(改鑄)에서 발생하는 차익, 상업 진흥을 통한 상인 대상 세금 징수, 그리고 부유층으로부터의 차입 등으로 재정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차입금은 오늘날의 국채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지만, 당시에는 지금의 국채만큼 신용도가 높지 않아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제 구조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었으며, 연공(年貢)에 기반을 둔 경제 체제에서는 막부뿐 아니라 각 번의 재정 역시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번정 개혁에 성공한 유한(雄藩)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부 번은 재정 개혁에 성공하여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고,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발언권을 확보하며 에도 막부 말기에 '유한(雄藩)'이라 불리는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번이 대부분 서일본의 외양(外樣) 다이묘였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번으로는 사쓰마·조슈·도사·히젠, 이른바 '삿초도히(薩長土肥)'라 불리는 네 번을 들 수 있습니다.
류큐(오키나awa)를 통한 중국과의 밀무역과 아마미 제도의 설탕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쓰마번, 시모노세키의 창고업과 금융업 등 해운 관련 수익이 컸던 조슈번, 그리고 도사·히젠 등도 강한 실력을 갖추어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밖에도 우와지마번, 후쿠이번 등이 막부 말기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들 역시 번정 개혁에 성공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각 번의 표고(表高)와 내고(內高)
그렇다면 유한이라 불린 번들은 실제로 어느 정도의 부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 순위 | 번 (현재 현명) | 다이묘 가문 | 분류 | 표고 | 내고 | 인구 |
| 1 | 가가번 (이시카와현) | 마에다 가문 | 도자마 | 102만 석 | 133만 석 | 106만 명 |
| 2 | 사쓰마번 (가고시마현) | 시마즈 가문 | 외양 | 73만 석 | 82만 석 | 90만 명 |
| 3 | 센다이번 (미야기현) | 다테 가문 | 도자마 | 62만 석 | 100만 석 | 20만 명 |
| 4 | 오와리번 (아이치현) | 오와리 도쿠가와 | 고산케(御三家) | 62만 석 | 90만 석 | 91만 명 |
| 5 | 기슈번 (와카야마현) | 기슈 도쿠가와 | 고산케 | 55만 석 | 61만 석 | 52만 명 |
| 6 | 히고번 (구마모토현) | 호소카와 가문 | 도자마 | 54만 석 | 78만 석 | 71만 명 |
| 7 | 지쿠젠번 (후쿠오카현) | 구로다 가문 | 도자마 | 47만 석 | 57만 석 | 39만 명 |
| 8 | 아키번 (히로시마현) | 아사노 가문 | 도자마 | 42만 석 | 48만 석 | 91만 명 |
| 9 | 조슈번 (야마구치현) | 모리 가문 | 외양 | 37만 석 | 98만 석 | 60만 명 |
| 10 | 히젠번 (사가현) | 나베시마 가문 | 외양 | 35만 석 | 89만 석 | 42만 명 |
| 11 | 미토번 (이바라키현) | 미토 도쿠가와 | 고산케 | 35만 석 | 31만 석 | 26만 명 |
| 12 | 안노쓰번 (미에현) | 도도 가문 | 도자마 | 32만 석 | 35만 석 | 24만 명 |
| 13 | 인슈번 (돗토리현) | 이케다 가문 | 도자마 | 32만 석 | 42만 석 | 37만 명 |
| 13 | 에치젠번 (후쿠이현) | 에치젠 마쓰다이라 | 신판(親藩) | 32만 석 | 33만 석 | 20만 명 |
| 15 | 비젠번 (오카야마현) | 이케다 가문 | 도자마 | 35만 석 | 49만 석 | 35만 명 |
| 16 | 아이즈번 (후쿠시마현) | 아이즈 마쓰다이라 | 신판 | 28만 석 | 40만 석 | 19만 명 |
| 17 | 아와번 (도쿠시마현) | 하치스카 가문 | 도자마 | 25만 석 | 44만 석 | 71만 명 |
| 18 | 구루메번 (후쿠오카현) | 아리마 가문 | 도자마 | 21만 석 | 26만 석 | 26만 명 |
| 19 | 구보타번 (아키타현) | 사타케 가문 | 도자마 | 20만 석 | 33만 석 | 43만 명 |
| 20 | 도사번 (고치현) | 야마우치 가문 | 외양 | 20만 석 | 50만 석 | 51만 명 |
먼저 용어를 정리하겠습니다. 표고(表高)는 에도 시대 초기의 검지(檢地)를 바탕으로 정해진 공식 석고로, 다이묘의 서열은 이 숫자로 표시되었으며 예법이나 군역(軍役) 부담도 표고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반면 내고(內高)는 이후의 검지 결과까지 반영한 실질적인 생산력으로, 마치 오늘날의 GDP와 같은 개념입니다. 실제 연공 수취액은 이 내고를 기준으로 산정되었습니다.
표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위 표에서 주목할 점은, 사쓰마번을 제외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 번들은 대체로 표고와 내고의 차이가 30만 석 이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차이가 클수록 해당 번의 재정적 여유가 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쓰마번은 표고와 내고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작지만, 원래 측정에서 누락된 땅까지 합산한 실질 석고가 35만 석에 달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부유했던 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도쿠가와 고산케(御三家)의 경우를 보면, 미토번처럼 내고가 표고보다 오히려 낮은 번은 재정이 빈약한 상태였다고 판단됩니다. 다이묘 가문 중 최고의 석고를 자랑하던 가가번은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내고가 표고보다 약 30% 높은 수준에 그친 점을 고려하면 숫자만큼 압도적으로 부유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개혁이 만든 유신의 토대
주목할 만한 점은, 성공적인 번정 개혁의 상당수가 인재 등용과 기존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정책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발상과 개혁이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음을 생각하면, 막부 말기의 역사적 흐름은 정치적 투쟁인 동시에 일종의 '경제 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