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라는 국명은 역사상 672년 덴무 천황(天武天皇)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일본'이라 하면 홋카이도부터 오키나와까지를 떠올리지만, 고분 시대(古墳時代)에 야마토 정권(大和政権)이 탄생했을 당시의 일본은 지금 우리가 아는 일본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현재의 영토 범위로 인식되기까지는 무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졌습니다.
고대 정부는 시대마다 저마다의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도호쿠 지방과의 전투, 근세의 에조(蝦夷) 및 류큐(琉球)와의 관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르는 '일본'은 어떻게 해서 오늘날의 일본이 되었을까요?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에 이르기까지 도호쿠 경영이 어떻게 큰 정치적 현안이 되었고, 조정이 그 지역의 귀속을 어떻게 요구해 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도호쿠의 반란과 조정의 대응
수도가 헤이조쿄(平城京)로 옮겨진 710년의 나라 시대부터, 그리고 794년에 시작된 헤이안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복속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던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에조(蝦夷)라 불리던 도호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정은 이들에게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에조라는 이름은 '오랑캐(미개한 민족)'를 뜻하는 말로 보입니다.
724년, 계속해서 저항하는 에조에 맞서 조정은 현재의 미야기현(宮城県)에 해당하는 지역에 다가성(多賀城)을 축조하고 에조 방어 시설을 구축했습니다. 이 다가성을 거점으로 군사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정은 다가성에서 북쪽으로 지배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정토군(征討軍)을 잇달아 파견합니다.
그 결과 에조는 점차 밀려나게 되지만, 무력에 의한 진압에는 반발심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조정의 무력 진압은 오히려 에조의 결속력만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조정의 무력 진압에 맞서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 이가 바로 에조의 수장 아테루이(阿弖流為)였습니다. 그는 도호쿠 특유의 지형을 교묘히 활용하여,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한 조정군과도 대등하게 싸워냈습니다.
조정의 트럼프 카드, 장군(쇼군)의 등장!
조정은 도호쿠의 지배 영역을 넓혀갔지만, 아테루이의 활약 앞에서 오히려 밀리기 시작합니다.
- 780년: 이지노 코레하리(伊治呰麻呂)의 난으로 조정의 도호쿠 통치 거점인 다가성이 불타다
- 789년: 정동대장군 기노 고사미(紀古佐美)가 이끄는 5만을 넘는 대군이 에조를 공격했으나 참패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테루이가 이끄는 에조군은 조정만큼 많은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지만 지리에 밝고 도호쿠 특유의 지형을 활용해 조정군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습니다.
에조군과 아테루이의 연이은 승리로 인해 조정의 도호쿠 지방 진출은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에 조정은 정예 지휘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등을 도호쿠 정벌에 파견합니다.
파견 이후의 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794년
쇼군(征夷大將軍)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와 부장군(副將軍)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약 10만에 달하는 조정군을 이끌고 에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801년
쇼군이 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약 4만 명의 조정군을 이끌고 에조를 공격하여 마침내 아테루이를 항복시킵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등장하자 조정과 에조 사이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그리고 801년 조정군의 승리로 에조와의 전쟁은 일단락됩니다.
여기서 오토모노 오토마로가 쇼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초대 쇼군이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필자 역시 처음에는 초대 쇼군이 다무라마로인 줄 알았습니다.
조정이 도호쿠에 집착했던 이유
지금까지 도호쿠로 지배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전투 과정을 살펴봤는데, 대체 조정은 왜 그토록 도호쿠에 집착했을까요?
여기에는 경제적 측면과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정치 노선,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경제적 측면: 금광의 발견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의 제정과 반포로 일본은 율령 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율령 국가 유지를 위한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백성들은 도망치거나 세금을 내지 않았고, 조정의 재정 상황은 점점 궁지에 몰려갔습니다.
불교의 힘으로 국가를 지키겠다는 '진언호국(鎮護國家) 사상'에 따라, 일본은 불안한 사회 상황을 극복하고자 도다이지(東大寺) 대불 건립에 착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의 대불(奈良の大仏)입니다.
문제는 이 대불을 만들려면 외국에서 수입한 금이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사관이 도호쿠의 무츠국(陸奥国)에서 금광맥이 발견되었다고 보고한 것이 749년의 일입니다. 이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정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더욱이 세력이 도호쿠로 확장됨에 따라 금광맥이 잇따라 발견됩니다.
금 채굴 외에도 도호쿠에는 조정의 재정을 충당해 줄 수 있는 각종 자원이 풍부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매력이 조정이 도호쿠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간무 천황의 정치 노선: '무력 행사와 도읍 건설'
또 다른 이유는 간무 천황의 정치 노선에 있습니다.
간무 천황의 재위 기간은 781년부터 806년까지로, 재위 후반부는 에조 정벌의 시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요컨대 에조 정벌은 간무 천황의 강한 의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력 행사' 부분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화려하고 웅장한 헤이안쿄(平安京)를 새로운 도읍으로 건설했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도시가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것이 곧 천황으로서의 권위의 높이를 드러내고 덕치를 상징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후 811년에는 후야노 와타마로(文屋綿麻呂)가 에조를 정복하면서 정벌군은 마침내 혼슈 최북단에 도달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로는 조직적인 에조 정벌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조정에 귀순한 포로들의 반란만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쓰가루(津軽)와 오시마(渡島)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에조라 불렸습니다.
에조와의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에조 정벌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부터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 시대에 이르기까지 혼슈 북단은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