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그 시대 일본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덕태자(우마야도 왕)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수(隋)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견수사) 외교 관계 속에서 일본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618년, 수보다 더 강력한 새 왕조인 중국의 당(唐)이 등장합니다. 당의 성립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를 지향하는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으로 이어졌고, 701년에 완성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을 기반으로 하는 율령 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또한 당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읍 헤이조쿄(平城京)를 건설했습니다.
국가 발전에 필요한 지식과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을 일본에 전해 준 것은 바로 견당사(遣唐使)였습니다.
견당사란?
견당사는 630년부터 894년까지 일본에서 당나라로 파견된 사절단입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건의로 폐지될 때까지 약 20회에 걸쳐 파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견 횟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합니다.
그 목적은 이전의 견수사보다 한 단계 나아가, 당으로부터 최신 문화와 발전된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당으로 유학을 가는 형식을 취했는데, 평균 유학 기간이 무려 20년 정도에 달했습니다. 긴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출세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인재 양성의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성당(盛唐) 시대와 관료 등용 제도
그렇다면 유학생들이 배우러 갔던 당시의 당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당나라는 618년부터 907년까지 이어진 왕조로, 특히 700년대 초반에는 긴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 당은 자국의 문화가 크게 발전했고, 그 풍요로움을 주변 나라들에게도 널리 알리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외교의 성공 덕분에 수나라 때처럼 빈번하게 벌어지던 분쟁이 줄어들었고, 동아시아는 당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습니다.
강대국을 운영하기 위해 당은 우수한 인재를 끌어모으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과거제(科擧制)입니다.
과거제는 가문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관리로 발탁하기 위해 치르던 시험입니다. 이 제도 덕분에 가난한 사람이라도 출세하고 부를 쌓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합격률은 몇 배나 차이가 날 정도로 낮아, 대략 1~2%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이 시험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당 사람이 아니어도 시험에 합격하면 관리가 될 길이 열려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어렵다고 알려진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일본인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입니다. 그는 당 황제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고, 결국 평생을 당의 관리로서 살다 갔습니다.
잠깐 화제를 돌려서, 왜 아베노 나카마로는 과거 시험에 응시해 관리가 되려고 했을까요?
당시 당은 유학생들의 유학 비용을 국가가 부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나라에서 유학생이 몰려오면서 당의 재정에 부담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당은 부담 기간을 10년으로 정하게 됩니다.
일본인의 유학 기간이 평균 20년 정도였던 터라, 나머지 10년치 비용은 스스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아베노 나카마로가 이러한 재정적 사정 때문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견당사가 일본에 가져다준 것
이야기가 다소 샜는데, 당에 파견된 견당사들은 귀국 후 무엇을 일본에 가져왔을까요?
정치
당시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견당사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불교와 법률 등 최신 학문과 지식을 본국에 들여왔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율령제(律令制)입니다.
불교
덴표(天平) 문화를 상징하는 쇼소인(正倉院) 보물에는 수많은 불교 경전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많은 경전이 일본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학문이라고 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데, 당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쇼무 천황(聖武天皇)이 불교의 힘으로 국가를 지키려 했던 배경에도 이러한 흐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의학
견당사는 의학 분야에서도 발전을 이루어, 환자와 부상자를 치료하는 의술과 약물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기술은 당시 유행병의 확산을 막는 방법이나 전쟁 후 부상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874년경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면서 낙양과 장안이 함락되고, 황소가 세운 기(齊, 880~884) 정권이 성립하는 등 당나라는 크게 쇠퇴합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894년, 견당사 대사로 임명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건의에 따라 견당사 파견은 중단됩니다. 이는 즉각적으로 끝내겠다는 의미라기보다 일시 중지 후 재개하겠다는 뉘앙스가 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창태의 변(昌泰の変)으로 좌천되면서 견당사 대사직은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결국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견당사의 긴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