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끈 자유민권운동, 일본 근대 국가 형성의 계기를 만들다

자유민권운동은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일본의 정치 체제가 크게 변화하는 가운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전개된 정치적 운동을 말합니다.

당시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 등 특정 번(藩) 인사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며, 정치는 국민에게 개방되어야 하고 국민의 선택에 따라 선출된 의원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이 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자유민권운동의 배경

자유민권운동의 배경에는 유신의 공로자인 사쓰마·조슈·도사·히젠(薩長土肥) 출신 인물들이 정부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여긴 사람들은 유럽 열강에 필적하는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헌법을 마련하고 의회를 구성하여 유럽과 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료 임용을 더욱 공정하게 하고 의원을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 생각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이 바로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였습니다. 그는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했고, 이 건백서를 통해 의회 개설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 무렵 이타가키는 홋카이도 개척사의 시설을 시찰하기 위해 홋카이도를 방문합니다. 당시 홋카이도 개척차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는 국가 소유 물건들을 사실상 헐값에 가까운 부당한 가격으로 민간에 매각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의 재량으로 국민 모두의 재산을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값에 넘기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었고, 여론의 비판은 날로 거세어졌습니다. 결국 정부는 더 이상 비판을 견디지 못해 타협책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건백서 내용대로 10년 후에 의회를 개설하겠다고 약속하게 됩니다.

정당 정치의 시작

그렇다면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프랑스를 본보기로 삼은 정당인 자유당(自由黨)을 창설했습니다.

한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동지들은 영국을 모델로 삼아 입헌개진당(立憲改進党)을 만들었습니다. 두 정당의 차이는 흥미롭습니다. 이타가키의 자유당은 이미 왕(루이 16세)이 사라진 프랑스를 본떴고, 오쿠마의 입헌개진당은 국왕이 존재하는 영국을 본떴습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운동은 또 하나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바로 '언론(言論)'의 힘으로 정부를 움직이려 했다는 점입니다. 이 덕분에 무사들은 더 이상 칼로만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으로도 정부에 맞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타가키의 정당은 오쿠마 시게노부의 당에 비해 급진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정부의 탄압 속에 한때 해체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오쿠마와 동지들이 내각에 참여하면서 자유민권운동은 점차 진정되는 흐름으로 접어듭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자유민권운동이 추구한 여러 방향 가운데 일본이 실제로 채택한 것은 영국식 국가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바로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의 호소로 시작된 의회 개설 청원에는 많은 서명이 모였으며, 이는 국회 설립을 촉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로서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자유민권운동은 당시의 정치에 맞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나라의 변화를 촉구한 운동이었습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서구식의 능률적인 제도와 자유로운 국가를 열망했습니다.

맺음말

이처럼 자유민권운동은 무사 정권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치 체제 변화 속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 한 정치적 노력을 상징합니다.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라의 미래 방향은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처음 구상했던 것과는 다른 길로 흘러갔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 체제 아래에서 자유민권운동이 발전했지만, 이 운동은 일본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