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國強兵)'을 국시로 삼아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가 직접 앞장서 국내 산업 육성 정책을 추진했는데, 일본 역사에서 이를 식산흥업(殖産興業)이라고 부릅니다.
공부성(工部省)이 주도한 관영 사업
정부는 식산흥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타국의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습니다. 1870년에는 식산흥업 진흥 정책의 중추 기관으로 공부성(工部省)을 설치했으며, 구 막부로부터 물려받은 광산·제철소·조선소 등은 관영 사업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특히 부국강병을 지향하던 정부는 군수 산업에 지속적으로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아울러 철도 건설과 전신·우편 등 운송·통신 인프라의 근대화도 함께 추진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871년에는 관영 우편 제도가 정비되었습니다.
운송 인프라 분야에서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외국 증기선 회사들이 연안 항로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평시에는 연안 해역과 해상 수송권을 확보하고, 유사시에는 군사 수송을 담당할 수 있도록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郎)가 경영하는 미쓰비시(三菱)의 해운업에 아낌없는 보호를 퍼부었습니다.
이후 미쓰비시는 관영 탄광과 조선소를 소유하며 일본 해운업계의 선두 자리를 굳건히 다졌고, 훗날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로 성장하게 됩니다.
내무성(內務省)이 추진한 중상주의 정책
공부성이 식산흥업을 주도하는 동안, 내무성은 민간 산업에 대한 장려와 보호·육성을 담당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해 서구 열강의 실태를 직접 목격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귀국 후 내무성을 설립하고 스스로 내무경(內務卿)으로서 정책 추진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번영이 절대왕정 아래에서 추진된 중상주의 정책* 덕분이라고 보았고, 일본의 발전에도 이를 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내무성을 정부 최고 권력 기관으로 삼고 영국의 정책을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 중상주의 정책이란 무역 등을 통해 화폐를 축적함으로써 국부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제 정책이다.
오쿠보는 공부경(工部卿)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협력하여 도미오카 제사소(富岡製絲場)와 아이치 방적소(愛知紡績所) 등 관영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당시 생사(生絲)는 가장 큰 수출품 중 하나였기 때문에, 관영 공장은 서양의 최신 기술을 제사 산업의 기계화에 도입하고 그 생산 기술을 민간에 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2014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미오카 제사소는 프랑스제 기계 300대를 도입해 1872년 조업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프랑스인 기술자를 초빙해 일본 여성 노동자들에게 기계 제사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이들 여공 상당수는 무사 가문 출신으로 '도미오카 공녀(富岡工女)'라 불렸으며, 전국의 제사 공장에 기술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정부는 농업과 축산업의 근대화에도 주목했습니다.
1876년 홋카이도에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學校)를 설립해 근대 농업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홋카이도 개발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했습니다. 홋카이도 개발과 러시아에 대한 방비를 위해 둔전병(屯田兵) 제도를 도입해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의 홋카이도 정착을 장려했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초빙한 호레이스 캐프런(Horace Capron)과 윌리엄 클라크(William Smith Clark)로부터 미국식 대규모 농장 경영의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이처럼 도입된 각국의 첨단 기술은 내무성이 주최하는 내국권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1877년 우에노에서 개최된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는 8만 점이 넘는 출품작과 45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산업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 박람회는 정부가 식산흥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