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메이지 정부의 봉건 신분제 폐지와 사민평등, 군사 제도 개혁

메이지 정부는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봉건 신분제의 폐지도 함께 단행했습니다.

신분제 개혁: 화족·사족·평민

1869년 판적봉환으로 각 번이 영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납하면서 봉건적인 주종 관계가 해소되자, 정부는 이를 계기로 기존의 신분 질서를 재편했습니다. 먼저 조정의 귀족(공가)과 다이묘를 모두 '화족'으로 통합하고, 무사는 '사족'으로 구분했습니다.

또한 에도 시대에 농·공·상 신분에 속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민'으로 통합되어 성씨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거주지와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으며, 화족이나 사족과의 혼인도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사민평등'은 명목상에 불과했습니다. 화족·사족과 평민 사이에는 여전히 큰 격차가 존재했고, 관리 대부분은 무사 출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호적 제도의 정비

신분제 개혁과 더불어 정부는 모든 국민의 성명과 주소를 등록하는 호적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1872년(임신년)에 작성된 '임신호적'은 메이지 정부가 처음으로 만든 호적으로, 비록 적용 범위가 남성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국민 모두가 동일한 의무를 지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징병령과 상비군 창설

신분제 개혁을 통해 국민을 장악한 메이지 정부는 이어 군사 제도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1873년 징병령이 공포되면서, 사민평등에 앞서 국민은 누구나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원칙이 선포되었습니다. 20세에 달한 남자는 신분을 불문하고 3년간 복무해야 한다고 규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에도 시대까지 이어져 온 병농분리가 폐지되고, 국민개병 원칙에 따른 상비군이 창설되어 근대 일본 국가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국민개병에 따른 징병제였지만, 면제 조건도 존재했습니다.

  1. 관리
  2. 관립·공립 학교 학생
  3. 장남 및 호주
  4. 당시 기준 270엔을 납부한 자

결국 유력자들은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는 경향이 있었고, 실제로 징집된 것은 가난한 농가의 차남·삼남이 많았습니다. 귀중한 노동력을 3년간 잃는다는 것은 가난한 농가에게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징병제 반대 운동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경찰 제도의 확립

한편 수도 도쿄에서는 1871년 치안 유지를 위해 3,000명의 경찰이 배치되었고, 1873년에는 내무성 산하에 경찰 조직이 정비되어 군대와 함께 반정부 세력을 단속하는 중요한 기구가 되었습니다.

무사 계급의 몰락과 질록처분

이처럼 추진된 메이지 정부의 개혁 정책들은, 한때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던 무사 계급을 점차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무사 계급이 독점해 온 군사 업무는 국민개병에 따른 징병제로 빼앗겼습니다. 나아가 무사의 경제적 특권이던 가록(家祿)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가록은 원래 소속 번이 지급하는 것이었지만, 판적봉환으로 번이 폐지된 후에는 정부가 그 대신 지급하고 있었습니다. 내우외환을 막 겨우 수습한 신정부는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무사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징병제에 의한 상비군이 창설되면서 가록은 정부에 큰 부담이 되었고, "가록은 군사 복무의 대가"라는 논리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되어 질록처분(秩祿處分)이 결정되었습니다.

1876년, 정부는 가록과 함께 지급되던 질록을 폐지하고, 대신 몇 년치 가록에 상당하는 이자를 지급하는 금록공채(金祿公債)를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이 질록처분으로 무사들은 모든 경제적 특권을 빼앗기고 궁지에 몰렸습니다.

관리나 경찰이 된 무사는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대부분의 무사는 생계를 위해 공채를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메이지 유신에 기여하면서도 특권을 계속 빼앗긴 무사들의 불만이 전국 곳곳에 고여 있었고, 결국 무사 반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