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내려지면서 새로운 메이지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초기 신정부는 도사·에치젠·오와리 등 공의정체파를 지지하는 웅번 번주들을 포함한 연립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무력 토막파인 삿마·조슈 연합군이 보신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들이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번(藩)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정부는 삿마·조슈·도사·히젠(사토도히)을 중심으로 한 연립 정부의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메이지 신정부의 탄생
신정부는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한편, 선진국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천황을 중심으로 강력한 통합 국가, 즉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반대 세력에 대한 진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구 막부 직할령과 각 번에 대한 지배 체제 정비에 착수했습니다.
1868년 4월 신정부는 정체서(政體書)를 반포하여 태정관(太政官) 제도를 확립했으며, 지방 행정은 부(府)·번(藩)·현(縣)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서일본에서는 도바·후시미 전투가 끝난 약 한 달 후부터 부와 현 설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동일본은 정세 수습이 늦어져 지배 체제 확립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정부는 간토 지역을 억누르고 통제하기 위해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했습니다.
또 같은 해 10월에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메이지 천황이 도쿄에 입성하도록 하고, 에도 성을 황거(皇居)로 삼았습니다. 간토 지역에 들어온 최초의 천황으로서, 천황을 최고 권위로 받들게 한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간토 지역에서도 부와 현 설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일본의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겼습니다. 이를 통해 천황을 조정 세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고, 천황을 근대 국가의 군주로 만들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신정부 지도자들은 다이묘가 지니고 있던 토지와 민중에 대한 지배권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키도 다카요시(조슈), 오쿠보 도시미치(삿마), 이타가키 다이스케(도사), 오쿠마 시게노부(히젠) 등 사토도히의 요인들이 논의하고 각 번주를 설득한 결과, 사토도히 네 번이 먼저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토도히 웅번의 뒤를 이어 1869년 6월 전국의 번주들도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실시했습니다. 판적봉환이란 구 번주가 소유하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환함으로써 봉건적인 지배·종속 관계를 부정하고, 신정부가 모든 토지와 국민에 대한 권한을 가짐을 제도적으로 확인하는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구 번주가 그대로 치번사(知藩事)로 남았기 때문에 종래의 영주 지배 체계가 사라지지 않았고, 신정부가 구상한 중앙집권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신정부는 비밀리에 준비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871년(메이지 4년) 먼저 삿마·조슈·도사 세 번의 병력을 모아 자체 무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폐번치현(廃藩置県)을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260개가 넘는 번들이 군사력에 굴복하는 형태로 폐지되어 현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구 번주들은 파면되어 도쿄로 옮겨갔고, 새로 설치된 현에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현령(県令) 등이 임명되어 지방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제도 개혁을 통해 다이묘의 봉건 지배는 완전히 종식되었고, 드디어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